어느 여백에 나를 채울까?

by 나무향기

마누아와 소라를 초대했다. 마누아는 꽃을 한 다발 들고 왔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의 백합과 데이지, 미니 카네이션이 어우러진 꽃다발이다. 꽃을 꽃병에 꽂아 두고 우린 그동안 차마 하지 못한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조이의 장례식이 있은지 이제 한 달여가 지났다. 마누아는 아직 엄마라는 세상이 없어진 공허함을 채우지 못하고, 그 공허함을 잊기 위해 일에만 매달려 산다고 했다. 소라 역시 친구를 잃은 아픔을 정원 일을 하며 잊으려 한다고 했다. 비를 맞으며 하는 정원 일은 그에게 상실의 아픔을 떨쳐 낼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그들을 초대해 조이를 추억하며 조이를 잃은 공허함을 달래고 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라고 말하기엔 슬픔이라는 단어가 너무 작다. 슬픔보다는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더 맞는 것 같다. 내 삶의 한 곳에 자리 했던 누군가의 부재를 늘 확인해야 하는 공허함.


우리는 이제 조이의 자리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야 했고, 그 자리를 채워야 했다. 마누아와 소라가 다녀간 지 이틀이 지났다. 거실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기분 좋은 향이 난다. 이게 무슨 향인가 보았더니 꽃봉오리였던 백합 하나가 꽃잎을 열고 있었다.

너였구나.

한 송이의 백합 향이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백합은 말없이 고개 숙인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가득 담고 있던 그윽한 향으로 거실을 채웠다. 향기로운 자신의 향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을 알리고 있었다. 백합은 내 쓸쓸한 마음도 채워주고, 모두가 나간 텅 빈 이 거실도 채워주고 있다.


활짝 핀 백합 옆에 또 하나의 꽃봉오리가 꽃잎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안 그래도 그 사이의 공간이 비어 있어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한송이가 꽃잎을 모두 열면 그 여백이 채워질 것 같다. 어찌 그리도 딱 맞게 자신의 자리를 찾았는지 못다 핀 백합 한 송이가 대견해 보이기까지 한다. 꽃잎을 열어 빈 곳을 메우고, 향기로운 향기로 자신이 있는 공간을 채울 것이라 생각하니 백합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이 백합만큼이라도 되는 인간일까? 내가 있을 자리를 잘 찾고, 내가 채울 여백을 잘 메우고, 내가 머무는 자리를 향기로운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일까? 꽃봉오리를 닫아두고 자신의 향기를 만들어 가던 백합처럼, 나를 드러내기 전에 나를 잘 채우고 있는 그런 사람일까?

백합은 애써 자신의 향기를 전하려 하지 않아도, 향기가 흘러넘쳐 그 주위를 백합향으로 채우고 있었는데, 나는 애쓰지 않고도 향기가 흘러넘쳐 나의 자리를 아름답게 채울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건지...


빈자리를 잘 찾아 자신의 잎을 틔우는 백합처럼 나도 나를 채울 여백을 찾고 싶다. 내가 있으나 없으나 한 자리 말고, 내가 들어갔을 때 딱 맞게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그런 여백을 찾고 싶다. 꽃봉오리를 닫고 자신을 열어 보일 준비를 하는 백합들처럼 자신을 먼저 채워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여백을 찾고 싶다.

<사진출처: 나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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