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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y 16. 2022

햇살 담은 빨래

청** 브랜드의 '햇살 담은 간장' 시리즈를 좋아한다. 요리의 고수가 아니라 간장 맛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자연을 담았다는 브랜드 정신이 맘에 들었다. 햇살을 담아 만들었다면 맛이 좋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햇살을 담은 것은 모두 아름답다. 오후 햇살을 담은 농부의 얼굴, 아침 햇살을 담은 유모차 안 아기의 웃음, 해거름 오후 햇살을 담은 우리 고양이의 가지런한 수염. 햇살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그래서 햇살을 담은 음식도 맛있다. 햇살 담아 잘 말린 무말랭이, 햇살 담아 잘 발효된 된장, 고추장, 햇살 담아 잘 익힌 물김치... 햇살만 담으면 모든 것이 일품이 된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에 햇살이 무척 그리워진다. 현실주의적 아줌마의 입장에선 햇살 담은 빨래가 몹시도 그립다. 빨랫감으로 산을 이룬 바구니는 비가 그쳐야 비워질 텐데, 비는 통 물러날 생각을 않는다. 원래 호주는 볕이 좋은 나라라 빨래 말릴 걱정이 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인간들이 자연을 괴롭힌 대가로 호주에선 이제 빨래 말릴 걱정이 쌓여가고 있다.

그래도 건조기를 사지는 않았다. 빨래만큼은 햇살에 말리고 싶은 소박한 주부의 로망(?)이라고나 할까? 햇살 담은 빨래를 걷을 때 느끼는 햇살 부자의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가슴팍에 말린 빨래들을 가득 안고 빨래를 걷을 때면 햇살을 내 가슴에 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햇살 품은 자의 풍요로움은 햇살에 말린 빨래를 한가득 안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난 빨래에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는다. 빨래에 오롯이 햇살 냄새만 담고 싶어서이다. 세제도 무향 세제를 사용한다. 그래서 좀 향긋한 빨래 냄새나는 세제를 써 달라고 식구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난 인위적인 향긋한 냄새보다 햇살 냄새가 더 좋다. 빨래는 내 영역이니 주인 마음대로라 민원을 모두 철회시켰다. 햇살 담은 빨래는 뻣뻣하다. 그 뻣뻣함 마저 난 좋다. 빨래가 햇살을 잘 입으면 잘 입을수록 빨래는 뻣뻣해진다. 아마 햇살을 두껍게 담아 뻣뻣한지도 모르겠다. 햇살을 담은 두께만큼 뻣뻣한 느낌의 빨래가 좋다.


뻣뻣한 빨래를 걷을 때면 어렸을 때 동태처럼 빨래 줄에 널린 내복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 빨래를 해서 널면 널자마자 빨래는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그나마 겨울 햇살에 사르르 녹았다가도 조기 퇴근한 해님 덕에 빨래는 다시 꽁꽁 얼어버려 걷을 때 동태가 되어 있던 내복들이 생각난다. 애가 넷이나 됐으니 겨울이면 동태 내복들이 넘쳐났다. 그 많은 동태 내복을 걷어 녹이고 데우기 위해서는 내가 햇살이 되어야 한다. 부족한 겨울 햇살을 대신해 내가 빨래를 품어야 했다. 엄마는 아랫목에 빨래들을 줄지어 펼쳐 놓으셨는데 난 그 위에서 알 품듯 빨래 위에 앉아 있었던 생각이 난다. 아래에선 온돌이 위에선 내 따뜻한 몸의 온기로 빨래를 녹였었다. 그렇게 내가 햇살이 되어 햇살 담은 내복들은 다시 동태에서 온전한 내복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도 아직 가끔 동태 내복이 될 때가 있다. 마음 시린 겨울이 찾아와 빨래 줄 위에서 얼어버린 동태 내복처럼, 굳어져 누군가의 햇살을 기다리곤 한다. 누군가가 내어줄 아랫목을 기다리곤 한다. 그때마다 고맙게도 자신의 아랫목을 내어주고, 자신의 햇살 담은 마음을 따뜻하게 나눠주는 이들이 있다. 무척 감사한 일이다.


동태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본연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고, 햇살을 온전히 품지 못해 얼어버린 사람들... 아랫목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내가 누군가의 아랫목에서 따뜻이 마음을 녹였듯이 나의 아랫목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싶다. 누군가의 햇살로 내 마음을 채웠듯이 내가 품은 햇살을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햇살 담은 빨래를 가득 안고 행복해한 나처럼 그들에게도 햇살 담은 마음을 한가득 안겨 주고 싶다.


햇살은 우리 모두를 빛나게 한다. 햇살을 감사히 여기길 줄 아는 사람, 햇살을 찾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햇살처럼 빛이 난다. 비가 계속 내려도 결국 나타날 햇살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햇살처럼 빛이 난다.


감사함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인내를 하며 햇살을 찾는 햇살 담은 사람이 좋다.


<사진 출처: The Spruce / Meg MacDon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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