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지 않은 탓인지, 날씨가 추워진 탓인지, 둘 다 때문인지, 남편이 감기에 걸렸다. 어제저녁까지도 말짱했는데 밤사이 바이러스가 발현된 것 같다며 괜찮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한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은 오한이 든다며 이불 하나 더 덮어 달라 한다. 심상치 않다. 어제는 말짱했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감기 증세가 나타났다면, 나도 오늘은 말짱하다가 내일은 아플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고, 감기 걸려 아무것도 못해 먹기 전에 빨리 육개장을 끓여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끈한 걸 먹으면 감기에 좋지 않을까 싶어 남편을 위해 서둘렀다.
냉장고엔 다행히 며칠 전 사둔 소고기 양지가 2킬로가 있었고(호주는 고깃값이 싸니 고기는 언제나 상비되어 있다) 배추 쌀 때 미리 만들어 둔 우거지, 근대 데쳐 놓은 것과 대파가 있었다. 고사리와 토란대는 없지만 한국 식품점까지 가려면 차를 타고도 멀리 가야 하고, 언제 고사리를 불리고 토란대를 불릴까 하는 생각에 고사리와 토란대는 건너뛰기로 했다.
양지를 두 시간 푹 끓여 건져 찢어 놓으니 우리 집 고양이 릴리가 와서 야옹야옹거린다. 몇 점 찢어 던져 주고, 준비해둔 재료와 슈퍼에서 급히 사온 숙주를 넣어 뭉근히 끓였다. 집간장으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 마늘을 넣고 후추를 톡톡 뿌려 맛을 보니 내 입엔 맛있다. 근데 국물이 영 맑다. 고기 기름 찌꺼기를 열심히도 걷어낸 탓일까? 어찌 되었건 맛있으니까 그냥 패스.
아들이 퇴근해서 배고프다고 난리다. 소 한 마리라도 잡아먹을 기세라며 밥을 빨리 달랜다. 때마침 육개장이 다 완성이 되어 밥 한 공기에 육개장 한 사발을 떠 주었다.
"육개장 어때?"
미식가 아들의 평가는 언제나 날 쫄게 한다. 아들은 요리도 잘 하지만, 절대 미각을 타고났는지, 맛에 대한 평가만큼은 칼처럼 날카롭다.
"맛있는데, 이거 육개장 맞아요? 육개장이라고 하기엔 국물이 너무 맑은데, 육개장은 국물이 좀 지저분하고 탁해야 맛있는데... 그래도 맛있긴 해요."
내가 느꼈던 바를 똑같이 뱉어내는 아들 녀석이 얄밉다. 배가 고팠으면 그냥 맛있게 먹어주지, 꼭 그렇게 콕 집어 말하고야 만다.
두 그릇을 비워 내더니,
"엄마, 차라리 육개장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소고기 우거짓국이라고 했으면 내가 일품요리라고 칭찬해 주었을 텐데..."
한마디 더 거든다. 때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 녀석도 배고프다며 밥 달라고 야단이다.
'그래, 알았다 이 놈아. 그게 먹히나 니 동생한테 시험해 보자. '
"하임아, 엄마가 소고기 우거짓국 끓였거든. 먹어봐. 어때?"
"엄마, 진짜 진짜 맛있어요!"
녀석도 후다닥 한 그릇을 비워냈다.
"사실 그거 육개장으로 끓인 건데, 육개장 맛은 안나?"
"제가 먹은 건 육개장 아니고 소고기 우거짓국이 맞는 것 같은데요. 헤헤..."
두 아들의 입맛은 정직했다. 난 육개장을 끓였는데 맛은 소고기 우거짓국이었다. '육개장'이라고 했을 땐,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맛이 되고, '소고기 우거짓국'이라고 했을 땐 일품요리가 되었다. 같은 음식인데도 이름 붙이기에 따라 맛이 달라졌다.
모든 것엔 걸맞은 이름이 있다. 수박은 수박다워야 하고, 토마토는 토마토다워야 한다. 속이 노란 수박은 아무래도 맛이 없다. 너무 달콤한 토마토는 아무래도 맛이 없다. 국물이 너무 맑은 육개장은 아무래도 맛이 없다.
내가 아무리 육개장을 끓였다고 외쳐본들, 소고기 우거짓국 맛이 나는 육개장은 소고기 우거짓국일 뿐이다. 비루한 육개장이 되기보단, 일품인 소고기 우거짓국이 차라리 낫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도 그런 것 같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억지로 좇으려 하기보단, 내가 가진 것으로 나만의 좋은 맛을 채워 가는 '나'인 사람이 일품이다.
사진: 나무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