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어느 작가님의 '눈물 나는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강아지는 자신을 데리고 가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간절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작가님은 그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하셨는데, 감정이 옮은 건지 나도 머릿속에 강아지 사진이 잊히질 않고 맴돌다 눈물이 났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강아지의 눈망울에 오전 내내 마음이 쓰였다.
마음도 울적하고 날씨도 울적한 날은 산이 최고다. 동네 산인 탬보린 마운틴으로 향했다. 남편은 맥주 한 잔 하고 싶다며 늘 가는 세인트 버나드 호텔로 향했다. 말이 호텔이지 한국으로 치면 여인숙 같은 조그만 곳이다. 하지만 식당과 정원이 아름다워 자주 들르는 곳이다. 호텔 입구엔 늘 그렇듯 세인트 버나드 개 한 마리가 축 늘어져 누워 있다. 150년이나 된 이 호텔이 유명한 이유는 이 호텔을 상속받은 분이 바로 호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이 개이기 때문이다.
세인트 버나드는 구조견으로 유명하다. 당시 이 호텔의 주인을 충견인 세인트 버나드가 지켜주어 자신의 사랑하는 개에게 이 호텔 상속을 유서로 남겼다고 한다. 자신의 개를 사랑하는 주인의 마음은 알겠지만, 과연 호텔을 상속받은 개는 행복할까?
이 호텔을 방문할 때마다 문 앞에 늘어져 있는 세인트 버나드가 가여워 보인다. 무료함에 지친 나머지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사람이 오고 가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견생을 포기한 듯이 보인다. 구조견이 여행객들의 관상용 개가 되어 문 앞만 지키고 있으니 견생에 무료함을 느낀 것 같다.
어떤 개는 시골 장터 우리 안에서 이산가족이 될 처지에 놓여 입양해 주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어떤 개는 이렇게 호텔까지 상속받았어도 축 늘어져 누워 있으니, 사람만큼이나 견생도 참 여러 생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눈에는 시골 장터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강아지보다, 삶의 모든 의미를 잃고 늘어져 하루하루를 무료함으로만 채우며 사는 세인트 버나드가 더 불쌍해 보였다.
작가님이 올리신 사진 속 강아지의 눈망울엔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견생을 아름답게 꽃 피워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애절함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본 이 호텔의 상속자인 세인트 버나드는 눈이 흐리멍텅하다. 삶에 대한 간절함도, 그 누구를 향한 애절함도 없다. 무료함에 범벅이 된 눈은 초점을 잃고 있는 듯했다.
견생도 여러 생이고, 인생도 여러 생이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할지도 모르고, 누구는 우리 안의 강아지처럼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누구는 수십 억을 유산받을지도 모르고, 누구는 수 억의 빚을 떠안고 살지도 모른다. 누구는 호텔을 상속받았을지도 모르고, 누구는 몸 하나 건사할 집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은 우리의 삶을 어찌할 수 없다. 호의호식하며 살아도 삶에 대한 간절함과 누구를 향한 애절함이 없다면 죽은 인생이다. 몸 하나 둘 집도 없이 살아도 삶에 대한 간절함으로, 누구를 향한 애절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있는 인생이다.
무료함에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인생이야 말로 불쌍한 인생이다. 아무리 가져도 채워지지 않고, 아무리 누려도 즐겁지 않은 무료함에 점철된 그런 인생이야 말로 불쌍한 인생이다.
'눈물 나는 사진'은 날 슬프게 했지만, 그 속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강아지라도 삶에 대한 간절함과 누군가를 향한 애절함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분명 좋은 주인을 만났을 것이다.
우리의 환경은 감히 우리를 어찌해 볼 수 없다. 우리의 눈빛은 그런 것들로 빛을 잃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이 주어진 환경에 꺾이지 않았으면 한다. 강아지가 가졌던 삶의 간절함과, 애절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눈빛을 사람인 우리도 잃지 않고 지켰으면 좋겠다.
<사진: 나무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