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건,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은 체득되는 것이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책을 통해 좋은 육아 방법을 배우고, 금쪽같은 내 새끼를 통해 오은영 박사에게 들어도 내가 직접 그 상황에 맞닥드리지 않으면 체득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도 책을 통해, 방송을 통해 간접체험을 해 보는 것도 좋을 테지만 아이들이 갖고 있는 개개인의 특별한 고유성 때문에 적용이 쉽지만은 않다. 돌이켜보면 내가 좋은 엄마가 되는 데 영향을 많이 끼친 건 내가 자녀일 때 엄마에게서 받은 좋은 엄마의 모본 혹은 엄마와의 좋지 않았던 경험을 통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도 힘든 것이, 나는 항상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였는데, 내 아들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개구쟁이라 적용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내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가장 근간이 되는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내가 배운 '사람이 되는 법'이다. 내가 한국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배우게 된 도덕적 윤리적 근간, 사회에서 부대껴 살아가며 체득된 사람을 대하는 법들이 내 아이의 좋은 엄마가 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어른들을 공손히 대하고, 친구 사이에는 의리가 중요하며, 앞을 향해 나가는 진취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한국사회를 통해 배우게 된 좋은 문화 말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를 통해 배우게 된 나쁜 습관들도 내 몸에 배어있었다. 경쟁의 구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삶,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결과주의적 성향, 빨리 처리하지 못하면 답답해하는 민족성, 이러한 것들이 좋은 엄마가 되려는 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내가 호주로 이민을 온 지 지금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한국적 성향이 다분한 엄마와 학교에서 배우는 호주 사회의 문화적인 간극 때문에 꽤나 혼란스러웠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사는 퀸즐랜드의 골드코스트는 이름 그대로 황금빛 해변이 펼쳐진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한 휴양지이다. 날씨도 후덥지근하고 늘 하늘은 깨질 듯 쨍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쁘다’라는 개념을 잊고 사는 듯하다. 늘 여유가 넘치고, 여유가 넘치다 못해 아주 미적거리는 것이 다반사다. 일처리도 한국이면 10분에 해결될 일들이 여기선 한 나절이 걸릴 때가 태반이다. 이런 느긋한 호주 사회에서 내가 배운 건 느려도 괜찮다는 것, 느림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천천히 흘러가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여러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서브웨이에서 풋 롱 두 개를 시켰는데 주문받은 직원은 여타의 서브웨이가 그렇듯 정말 세월아 내월아 하며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내 뒤에 사람이 들어오고 또 주문이 들어왔는데도 세월아 내월아는 마찬가지. 나는 만드는 걸 보다가 속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하물며 내 뒤에 있는 사람은 미쳐 돌아가시지 않을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무거운 공기를 부숴버리기라도 하듯 뒤에 있던 사람이 직원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 어때? 바빴어?”
“점심시간에 좀 바쁘더니 2시 넘어가니까 이제 괜찮아. 너는?
“ 나도 이제 막 일 끝내고 너무 배가 고파서 서브웨이 먹으러 왔지. 그나저나 네가 만드는 샌드위치 정말 크다. 그렇게 많은 내용물을 다 넣고도 그게 싸지려면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겠는데?”
“그지? 나도 잘 싸 보려고 노력 중이야. 하하하”
내 머리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나타낸다는 것, 여유롭게 기다리며 그 직원을 칭찬까지 해 준다는 것, 이런 것들이 내 머리를 사정없이 쳐댔다. 다분히 한국적인 마인드인 나는 내가 받을 ‘빵’에만 관심이 쏟아져 있었는데, 이 호주 사람은 배고파서 사러 들어온 ‘빵’보다 그 빵을 만들어 주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맞춰져 있었고 기다리는 시간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일은 호주 살면서 비일비재하게 겪는 일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제는 하도 머리를 얻어맞아서인지 나마저도 모르는 사람에게 오늘 하루가 어떤지 물어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슈퍼 계산원과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
물건이나 일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절체절명의 중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일’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 이런 것들이 호주 사회에서 내가 체득하게 된 새로운 것들이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나가 관공서를 가게 되면 너무나 빠른 일처리에 감탄을 자아내며 호주라면 꿈도 못 꿀 일이라 한국 사회의 발 빠른 시스템을 칭송하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중요한 건 결국 '발 빠른 해결’보다는 ‘즐기는 과정’이란 걸 엄마로서 내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할 일을 제 때 척척 잘해 내고,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해 내는 아이보다는 제 때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해도 즐겁게 해 내는 아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려고 끙끙거리기보다는 자기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찾아내 즐겁게 하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엄마란 사람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 있어야 했다. 이렇게 되는 게 정말 나로선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호주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결국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난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좋은 엄마는 좋은 사람이 된 엄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