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샤프를 손에 쥐어 본 것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이다. 볼펜대를 업은 몽당연필 가득한 무거웠던 필통은 단출한 샤프 하나와 샤프심으로 미니멀화 되었다. 벤츠도 아니고 롤스로이스도 아니면서 검은색 망토를 둘러싼 0.5mm 제도 샤프는 뭔가 나를 레벨업 시켜주는 학용품이었다.
샤프는 샤프를 사용할 때보다 샤프심을 넣을 때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때만큼은 마치 내가 카이스트 연구원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연구원처럼 실험실 샘플 다루듯 샤프심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혹여나 꺼내다 부러지지 않게 통에서 샤프심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실험실 장갑이라도 낀 것 마냥 고이고이 꺼낸다. 샤프 뚜껑을 열고, 지우개 달린 내부 부품을 하나 더 꺼내어 샤프심을 넣는다. 마치 무균실에서 세포 샘플 다루듯 조심스럽게 샤프심 구멍으로 샤프심을 넣는다. 이 순간 느끼는 긴장감과 스릴이란... 하지만 넣었다고 끝이 아니다. 다시 꺼내 놓은 지우개 핀을 시험관 뚜껑 닫듯 끼우고, 샤프 뚜껑까지 이중으로 마감을 하면 이제 샤프를 눌러본다. 마치 주사기 바늘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딸깍딸깍. 세포를 안착시키듯 제자리에 안착되어 좁디좁은 0.5mm 주사기 구멍 같은 뾰족한 구멍으로 샤프심이 나오면 이제 안심이다.
우리도 그렇게 태어났다. 샤프심처럼 그렇게 태어났다. 수십 개의 샤프심에서 한 개의 샤프심이 선택되듯, 수 억 개의 정자 중 하나가 선택되어 하나의 난자와 만난다. 샤프심이 샤프 머리에 안착되듯, 조심스럽게 수정란이 엄마의 자궁에 안착되면 긴장과 스릴 가득한 여정을 거친 후, 좁디좁은 산도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샤프심이 뾰족한 샤프 머리끝으로 머리를 쏘옥 내밀듯 그렇게 나왔다. 그렇게 연약하디 연약한, 부러질 것만 같아도 결국 제 몫을 해내는 우리가 태어났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우리 반에선 이상한 경기를 했다. '샤프심 경기' 였는데 샤프심을 가장 길게 빼내어 글씨를 한 글자 먼저 쓰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더 많이 빼내 보려고 조금만 욕심을 부려도 샤프심은 속절없이 부러졌다. 조금만 힘을 주어 글씨를 써도 샤프심은 댕강 부러졌다. 결국 욕심부리지 않고 적당히 짧은 샤프심으로 힘 빼고 글씨 쓴 아이가 이겼다.
한글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이 글씨 쓰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하루는 심통이 난 녀석이 샤프심을 계속 부러뜨리고 있다. 너무 힘을 꽉 주어서 글씨를 쓰려고 할 때마다 샤프심이 부러진다.
"민재야, 그러다 샤프심 다 없어지겠다. 너무 손에 힘주지 말고 해 보면 어때?"
이런 내 말도 못마땅했는지 녀석은,
"괜찮아요. 부러지면 새 걸로 다시 넣으면 되지요."
하더니, 기어코 샤프심이 다 할 때까지 툭툭 부러뜨려간다. 샤프심은 다 부러져 버리고, 더 이상 나올 샤프심도 없자 녀석이 이제야 샤프심 통을 꺼낸다. 그런데 샤프심 통이 비었다. 샤프심이 없다.
"아이씨, 샤프심이 왜 없는 거야."
나는 내 필통 안에 있는 연필을 건네주었다.
"니가 샤프심 다 부러뜨렸으니까 샤프심이 없지."
태어나는 과정만 샤프심을 닮은 게 아니다. 태어난 후 우리의 인생도 샤프심을 닮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닌 그 이상을 하려고 하면 우리의 인생은 휘어진다. 적당한 힘을 주지 않고 너무 힘주고 살면 인생은 부러지게 마련이다. 내 샤프심 통에 샤프심이 계속 두둑할 줄 착각하고 인생을 함부로 쓰면 언젠가는 샤프심이 남지 않은 빈 통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너무 많은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다. 그래서 우린 휘어지기도 하고, 부러지기도 하며 살고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샤프심은 많지 않다.
샤프심을 보며 인생이 제 가치를 다하려면 욕심부리지 말고, 힘 빼고 살아야 함을 배우게 된다. 내가 가진 샤프심은 고작해야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샤프를 쓰다 보면 샤프심이 얼마 남지 않을 때가 온다. 그때 샤프심은 힘을 잃고 자꾸만 쑥쑥 들어가려 한다. 나온 샤프심을 아무리 고정하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그렇다고 샤프를 너무 눌러대면 한 번에 쓩 하고 나와 샤프심이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사람이 생을 다할 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면 그제야 자신을 아끼게 된다. 젊었을 때 아무렇게나 굴렸던 몸이 더는 말을 듣지 않게 될 때, 그제야 자신을 돌보게 된다. 얼마 남지 않고 자꾸만 기어들어가는 샤프심이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한 치라도 생을 이어 가고자, 며칠이라도 죽음을 유보하고자 하는 인간이 닮아있는 것 같다. 안간힘을 쓰는 샤프심 같다. 안 나가겠다고 숨어버리는 샤프심 같다.
누구나 힘을 잃게 되는 그때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그제야 힘주고 산 젊은 때, 내가 왜 그렇게 힘주고 살았는지, 내가 왜 그렇게 함부로 나를 소모시키며 살았는지 후회하게 된다.
나도 아프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고 나서야 나를 너무 소모시켰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생이 샤프심 같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밖으로 아예 나와버린 얼마 남지 않은 샤프심을 다시 샤프심 구멍에 넣고 조심스럽게 써 본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 신중함과 간절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산다면 마지막 샤프심이 글씨를 써내려 갈 때에도 만족한 가운데 생을 마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내 샤프심 통엔 샤프심이 남아 있다. 아직 남아 있는 샤프심은 힘 빼고, 아껴가며 쓰려한다. 샤프심이 즐거이 자신을 닳게 할 수 있도록 인생 길을 아름답게 써내려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