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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 Feb 24. 2021

폴댄스, 수줍음을 넘다

움직이는 사람TYPE_폴댄스


운동은 나 자신과의 싸움 같아서, 어쩐지 드러내기 망설여지는 분야였다. 게다가 운동하는 곳은 힐링의 장소이기도 했으니, 운동 전후를 찍거나 SNS 등 어딘가에 올리는 부산스러운 작업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가를 할 때도 휴대전화는 무음으로 한 뒤 탈의실 가방 안에 넣어두고, 조용히 내 몸과 타월만 가지고 요가매트 위로 살금살금 걸어가 조심스레 앉곤 했다. 나에 대한 많은 것이 들어있는 데다 유용한 기록이 넘쳐나지만, 한편으로는 지겹기도 한 요물 같은 휴대전화를 들여놓고 싶지 않은 '성역' 같은 곳이 몇 군데 있었고, '운동하는 곳'은 그중에 하나였다.


폴댄스 학원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중, 1회 체험수업이 가능했던 어느 유명 폴 댄스 학원은, 어둡고 붉은 조명에 휘감긴 클럽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몸 풀기 동작은 '나는 애벌레로소이다.' 하는 마음이 들 만큼 웨이브를 타는 등 바닥에서 꾸물럭 대는 동작이 많았고, 폴 역시 실리콘 폴이 아니었기 때문에 맨 살이 아니면 오를 수조차 없었다. 맨 살이 낯선 바닥과 기구에 닿는 것은 꽤 찜찜한 일이었고, 나의 최선이었던 핫팬츠와 요가 탑을 입고 삼면이 거울로 된 그곳에서, 집중은커녕 휴대전화 카메라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나처럼 체험 수업을 하러 온 것이 분명한 두 소녀는, 정말 예쁘게 차려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폴을 잡고 포즈를 취할 때마다 서로를 찍어 주느라 분주했다. 사방팔방이 거울이었으니 피할 곳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사진이나 영상에 나오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마찬가지로 요리조리 최선을 다해 피해 다니느라 분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 다니면서도, 집에서 가까운 데다 개월 수가 늘어날수록 할인율이 높아진다는 점에 끌려 몇 개월치 수업을 바로 등록하지 않고, 체험 수업부터 신청한 자신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어쩔 뻔했니.라고.



마음과 분위기가 연결되는
공간


그래서인지, 수업 때의 동작을 촬영해서 보내준다는 선생님의 말에 순간 '흠칫!' 해 버렸다. 선생님은 어딘가에 공유하거나 공개하는 게 아니라, 본인에게만 보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뭐, 뭔가 도움이 되겠지? 내 모습을 보고 다음 수업에 오면 참고가 될... 지도 모, 모르니까...'

하는 믿음과 망설임이 뒤섞인 마음으로 대답을 쥐어짰다. 몹시도 두근거렸던 첫 폴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이 내게만 보내 준 영상은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그룹 수업이지만 한 명 한 명 동작을 촬영할 때는 모두 가장자리로 비켜나서 관찰해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앵글에 잡힐 일이 없다. 그래서 더 부담스럽지만, 더 힘이 나기도 한다. 멋지게 잘해서 한 방에 멋진 영상을 뽑아내겠다는 의지가 동작에 더해진다. 그런 에너지가 묻어 나왔다.  


영상은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길이의 거의 '움짤'수준이었지만, 뿌듯했다. 아직은 골반높이의 폴에 간신히 올라가서 정지된 상태에서 팔을 뻗거나, 팔을 뒤로 돌려서 폴을 감거나, 한 손으로 폴을 잡고 다른 손은 바닥 쪽으로 뻗어 내리는 정도의, 마치 살포시 매달려서 교통정리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동작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조금 더 예뻐 보였고, 성취감이 올라왔다. 게다가 영상을 보고 수업 한 내용을 복습해서 순서를 외워가면 다음 수업 때 조금 더 원활하게 배울 수도 있었고, 초보 눈에만 보이는 정도긴 해도,

'여기서 팔을 좀 더 뻗었으면 예뻤을 텐데......'

'분명히 고개를 뒤로 많이 꺾는다고 꺾었는데, 영상을 보니 티가 별로 안 나네. 진짜 작정하고 뒤로 많이 꺾어야 하는 거구나......'

등 혼잣말이 많아졌고,

고칠 점과 고치고 싶은 점이 보였고, 자꾸만 욕심이 났다. 



내 안에서 나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것만 해 봤는데, 이렇게 매번 영상을 촬영해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동작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니, 성취감이 두 세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리고 외부의 기록으로 나의 노력의 결과물이 남는다는 건 꽤 기분 좋은 데다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일이었다. 매주 쌓인 수업 영상을 보면, 꼭 눈 쌓인 길 위에 난 발자국 같았다. 처음엔 비뚤배뚤 좁은 보폭으로 걷지만, 조금씩 넓고 곧게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예쁜 발자국이 쌓인 길을 한 번에 모아 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한 달이지만 한 달 끝무렵의 영상 속 나는, 처음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무렵 회사는 고통의 장소였다. 가족 같은 관계를 맺고 있는 회사 내 대부분 사람들 속에서, 견디고 외면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환경 속에서 일적인 성취감, 보람 등을 얻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눈에 띄면 띌수록 나에게 불리했으니까. 무엇을 해도, 혹은 하지 않더라도 부질없을 뿐이라는 생각에 나는 거의 자포자기, 무력감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래서 요가와 병행할 새로운, 또 다른 운동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대책 없이 무작정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상처 받지 않을 자신도 없었으니까. 회사라는 원인을 제거하지 못해서 다른 쪽으로 숨통을 틔워 신경을 돌리고 싶었다. 

다행히, 폴댄스 수업을 하는 동안에는 회사 생각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새로운 동작의 순서를 외우는 데 집중해야 했고, 아름다운 선생님의 몸짓을 조금이라도 따라 하고 싶어 좇기 바빴으니까, 선생님이 시범을 보여줄 때면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냥 그 정도로, 회사에 대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신경을 조금만 돌려도 충분했는데, 예상 밖의 성취감까지 얻고 있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영상 속의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땐
몸을 먼저


마음이 다쳐있을 , 몸이라도 행복한 움직임을 느낄  있게  주려고 한다. 많이 쓰고, 움직이고, 무엇이든 배우면서. 생각이 자꾸 나쁜 쪽으로 빠지는  막기가 너무나 어렵고, 날카롭게 갈린 돌멩이 끄트머리 같은 나쁜 생각에 마음 다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없으니까.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고, 집안 곳곳에  붙여둔 포스트잇만 수십 장이지만, 포스트잇에 쓰인 말은 분명 내가  것인데도, 실행이  된다. 마음이 그렇게  따라주지 않는다. 



폴댄스를 하는 시간만큼은, 나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하는 동안만큼은, 뿌듯한 만족감과 함께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올라왔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삶에서 지치는 속도가 더뎌지도록, 나를 끌어당겨주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2달, 4달, 1년 치의 폴 댄스가 내 몸에 쌓이고, 내가 조금은 덜 아팠으면.   



사진 출처: Image by ❤️ Remains Healthy ❤️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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