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남자 Aug 29. 2019

와이파이보다 끈끈한 사랑!

나만 외로운 걸까? #15 (후기 청년기의 우울과 외로움에 관한 연재)


386의 몰락

     

예전에는 회사에서 부장님의 위치는 대단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부장님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회사의 여러 부서를 이동하며 읽힌 업무 노하우는 기안지 제목만 봐도 다시 작성해야 할지 통과될지 알았다.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그만큼 경험으로 쌓은 빅 데이터는 촉수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부장님 말 한마디에 부서는 좌지우지되었다. 부장님의 대우도 남달랐다. 부장님은 실질적인 회사 그 자체였다.

     

시골의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많은 노인 한 사람의 존재는 도서관이나 백과사전 역할을 하였다. 마을의 주요 행사는 노인에게 물어서 결정하고 노인의 지혜를 빌어서 농사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부장님이나 마을 노인은 빅 데이터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의 설자리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괜히 잘못 아는 척해봐야 돌아오는 답은 꼰대 취급이었다.

     

회사의 부장님이나 마을의 촌장의 지식으로는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능가하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선보여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였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고 또는 경험이 축적되었다고 지혜로우란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따라서 부장님이나 촌장님은 더 이상 대우를 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미 쌓여 있는 수많은 빅 데이터를 내 것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보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다수가 젊은 세대들이었다. 우리처럼 부장님 세대들은 이제 죽도 밥도 아닌 어정쩡한 낀 세대가 되어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눈치만 보며 살게 되었다. 이게 다 그놈의 인터넷의 발달이 빌미를 제공한 결과였다.

     

세상의 급격한 변화에 누구보다 환호했던 세대가 바로 우리 386세대였다.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2000년대 초에 IT 기업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며 마치 한국이 전 세계의 IT산업을 주도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구굴,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등이 세계를 이끌었다. 우리는 다음카카오와 네이버만 겨우 생존하고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언론에서는 연일 IT 강국과 벤처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국민들은 꿈과 희망에 부풀었다. 코스닥 상장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국민들도 기업들도 많았다. 하지만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참패의 원인은 내가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다. 지구촌이라는 단어의 이해 부족이 가장 컸다. 혁신과 창의력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았다. 세계를 향하지 않은 기업들은 결국은 좁은 내수시장에서 서로 치고 박고를 반복하다가 같이 무너져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386세대들은 뒤늦게 현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멸종되었던 거대 공룡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그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 그나마 몇몇 대기업만이 힘겹게 그 공룡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갈길 잃은 386 세대들은 이른 은퇴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진 지식이나 지혜는 어디에서도 필요치 않았다.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명예롭지 못하게 물러났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건재함을 보여주어야 하는 과제 하나씩을 안고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야만 하였다.   

     

그 결과는 그들 자신이 스스로 직장을 만들어 스스로를 취업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을 프랜차이즈 공화국으로 만드는데 가장 적극적인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평생 회사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만 받고 자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야생으로 내몰린 이들의 운명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게 나의 동료들과 선배들은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오늘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미래의 결과는 참혹하고 비참하였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값비싼 수업료가 대신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한 그들은 지혜도 지식도 없었다. 내가 하면 다를 거야!라는 순진한 무모함만이 전부였다. 그들과 운동 후 마시는 막걸리 한잔에는 진한 회환들이 담겨 있었다. 학창 시절 하늘 같은 예비역 선배들이 마시던 투박한 막걸리 사발이 그리워졌다. 그토록 위풍당당하던 선배들이었는데, 그토록 견고한 사발이었는데,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하여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물론 나도 그 뒤를 바짝 뒤 쫓고 있었다.



축구가 뭐 길래

     

나는 축구의 본고장이라는 영국에서 20년을 살았다. 축구는 영국에서만 특별한 줄 알았다. 영국의 축구 열기는 종주국이라는 것을 실감하고도 남을 만큼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의 일상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축구 가방을 챙겨서 축구장으로 향하였다. 토요일은 우리 가계가 가장 바쁜 날이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7시까지 출근해서 토요일 영업 준비를 마치고 10시에 운동장으로 향한다. 오전 운동을 마치면 다시 샤워를 하고 오후에 가계로 출근한다. 이러한 과정은 아주 오랫동안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다.

     

지난해 가을 한국에 와서 느낀 한국의 축구 열기는 신통치 않았다. 프로축구 경기를 가끔 시청하다 보면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다. 반면 야구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축구는 야구만큼 인기가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학교 동문들이 운영하는 동호회에 가입하면서 한국 축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들의 열정은 프로선수들 못지않았다. 1주일 내내 축구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단톡 방과 밴드에는 수시로 글들이 올라왔다. 한동안은 이러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 힘들 정도였다. 잠시 저러다 말겠지 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배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들은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뜨거워져만 갔다.

     

나이는 다들 손자를 볼 나이들인데 왜 갑자기 축구가 좋아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좀처럼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축구를 시작한 지는 2년 정도밖에 안된다고 하였다. 그전에는 각자 알아서 골프나 다른 운동들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축구로 종목이 바뀌고, 축구에 미치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궁금증은 몇 달이 지나서야 풀렸다.

     

이들이 정말 원했던 것은 축구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어느 정도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축구였다. 축구에는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축구는 하다 보면 축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축구가 끝나면 식사도 하고 뒤풀이도 한다. 삭막하기만 했던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이다.

     

축구장에서 만날 때마다 마주하는 그들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다. 어린 시절 동네의 형들과 학교 운동장의 맨땅에서 마을대항 축구시합을 하던 그 형들의 모습이었다. 잘난 것도 자존감도 없던 형들이었지만 그들의 얼굴 자체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표정들이었다. 세상 진지하던 그 표정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유난히 어렸을 때의 기억력이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동네 형들과 지금의 학교 선배들의 표정에는 일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세상을 다 가진듯한 표정이다. 경기 중에는 그 복잡한 사업도, 집안 문제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동네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마을과 시합 중에는 바쁜 농사일도, 부모님의 불호령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축구에만 몰입하였다.

     

어린 시절 다른 마을과 돈을 걸고 시합하던 형들의 얼굴 못지않게 나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승부욕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나였다. 축구를 하는 그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였다. 하지만 대학의 선배들은 축구를 계속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축구와 담을 쌓고 살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갑자기 축구에 빠져든 이유는 간단하였다. 축구는 하나의 매개체에 불과하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공동 사회인 게마인샤프트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형과 친구들과 동생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어릴 적 추억을 자꾸 소환해 보려는 의도의 숨은 이면에는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왜 외로운 것일까?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인맥도 화려한 선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선배들은 항상 외로워 보였다. 물론 그럴 나이에 접어들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조건이나 척도로만 본다면 외로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선배들이 태반이었다. 나처럼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만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축구는 우리를 어린 시절의 동네 형과 동생들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축구는 인터넷의 와이 파이가 끊어놓은 사람 사이의 연결망을 다시 이어주고 있었다. 선배들이 축구에 미친 이유도 끊어진 연결고리를 찾아 나서다 보니 축구만 한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회원들의 직업이나 경력도 다양하다.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 출신과 축구선수 출신은 물론이고 병원장에서부터 변호사나 교수까지 다양하다. 나는 이민으로 단절된 한국에서의 인맥을 축구로 복원하고 있었다. 선배들의 운동 스타일과 달리 나는 성격상 경기를 대충 하지 못하는 큰 단점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한다. 허리디스크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고쳐지거나 개선될 수 없는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스타일대로 무식하게 열심히 뛴다. 팀에서 막내 격인 나는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 부상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축구로부터 위로받는 방식이다. 그게 내가 축구를 통해 외로움을 털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선배들과 많이 친해진 이유도 나의 적극성 때문이었다. 경험상 축구는 열심히 뛰지 않으면 반드시 부상을 당한다. 부상을 당하지 않으려고 몸 사리는 순간 몸은 경직되고 부상당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처럼 축구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묘한 마력이 숨어있다. 그리고 게마인샤프트를 맛볼 수 있게 하는 최고의 운동 중 하나가 바로 축구다.


     


작가의 이전글 쇼핑 중독자들의 특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