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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30. 2019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구!!

테오도라 #15. 너를 보내고 다시 100일을 맞이하며..

     


어머니의 눈물

     

테오도라의 어머니는 강한 분이라는 사실을 이번 사고를 겪으며 처음 알았다. 테오도라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이다. 외동딸로 귀하게 자랐다고 들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모의 얼굴에서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가끔은 할머니와 마주하고 있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모든 것이 할머니와 닮았다. 냉정하고 고집스러운 성격마저도 할머니를 닮았다. 고모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강인함이 오버랩된다. 경제개념이 투철하면서 항상 근검절약하는 모습까지 할머니를 닮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에서 3년간 자랐기 때문에 할머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예민하고 방황하던 고등학생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시골의 중학교에서 연합고사를 보고 전주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처음 몇 달은 혼자서 자취를 하였지만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생전 처음 밥을 하고 살림을 하며 고등학생 생활을 정상적으로 한다는 것은 초인이나 할 수 있는 힘든 생활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상의를 했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파견하는 것으로 협의가 되었다. 고부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그 시기에 할머니도 어머니도 좋아하셨다. 가장 좋아하신 분은 물론 아버지셨다. 그렇게 가정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할머니는 자유롭게 사셨다. 손주 하나 밥해 주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을 정도로 모진 세월을 헤쳐 나오신 분이셨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으셨고 보릿고개도 수없이 넘으셨던 분이다. 내가 학교에 가면 할머니는 전주천에 나가 나물을 채취해서 남부시장에 내다 파셨다. 시간과 계절이 지날수록 할머니의 영역은 전주 외곽의 모든 곳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그렇게 3년 동안 할머니는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시며 자신의 취미생활을 하셨다. 더 이상 며느리와 싸우지 않아도 되고 나서부터 할머니 얼굴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훌륭한 전사가 되어있었다. 1주일에 한번 시골집에 가면 어머니는 밑반찬과 용돈을 넉넉하게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 몰래 담배도 몇 보루 신문지로 싸서 주셨다. 할머니를 위한 담배가 아니고 나를 위한 담배였다. 나는 이미 고2 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만 모르고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머니는 담배를 피워도 공부만 제대로 하라면서 항상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때 어머니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고 학생 놈이 담배나 피운다고 호통을 쳤다면 나는 공부를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고모의 눈물을 보며, 나는 할머니의 눈물을 보는듯하였다. 생각보다 고모는 딸의 죽음에 의연하였고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부녀간의 정이나 관계의 문제에서 오는 회환이 아니었다. 테오도라와의 갈등을 풀지 못해 이런 사고가 터진 거라고 믿고 계시는 듯하였다. 첫날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면서 고모는 피의자가 최후 진술을 하듯 딸과의 불화를 애절하고 처절하게 호소하고 계셨다. 대역죄 이상의 죄를 지은 죄수와 같은 자세로 취조에 응하셨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의 조서 작성을 마친 뒤에도 고모는 의연하셨다. 결코 당황하거나 실신하지 않았다. 그런 고모가 눈물을 많이 흘리신 것은 장례식의 발인도 화장도 아닌 장례식의 마지막 과정인 납골함 안치의 미사에서였다. 딸에게 보내는 직접 작성하신 손 편지를 읽으시며 그리고 찬송을 하시며 많이 우셨다. 발인이나 화장할 때는 테오도라가 가장 미워했던 친오빠가 가장 많이 울었다.


눈물이 나 울음이라는 단순하고 표면적인 방법으로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울지 않고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 죽음에 익숙해서나 의연해서 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이고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피해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불공평하고 슬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죽음은 공평하게도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단, 그 시기와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순서가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굳이 슬퍼하지 않는다.

     

     



언니와 오빠에 대한 오해

     

테오도라는 가족들과 심각한  불화를 겪고 있었다. 한 때는 나와의 불화도 몇 년간 지속되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과의 불화는 역시 테오도라의 삶의 방식과 태도였다. 그 근거가 쇼핑중독이었고 지나친 쇼핑은 그녀의 생활을 점점 힘들게 하였다. 모두가 한 트럭의 옷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쇼핑중독은 심각하였다. 왜 그녀가 자꾸 쇼핑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낭비벽을 비난하였고 경제관념이 없다고 타박하였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와 친오빠가 심하였다. 이 두 사람은 결코 딸의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다른 형제자매들이 이해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거의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언니들도 포기해서인지 더 이상 말도 하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한 사람의 생활습관이나 가치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족이어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부부간에도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쯤은 그러한 생활습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건 퇴로가 막히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애석하게도 테오도라의 퇴로를 열어줄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래서 그녀도 나의 입국에 기대를 걸었고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나라면 자기를 이해해주고 응원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지난가을과 겨울에 몇 번의 약속은 계속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약속은 취소되거나 다음으로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2월이 찾아왔고 나에게도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12월 3일이 그녀와의 마지막 카톡 대화 메시지를 주고받은 날이었다. 그렇게 우울증에 눌리면서 나는 병원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도 않았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성탄절 날 아침에는 A형 독감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1주일간의 자가 격리치료를 받으면서도 우울과 싸우는 일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월 말이 다가오고 설날이 되어 시골에 내려갔다. 며칠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었다. 그 일환으로 2월부터 책 쓰기를 한다고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나는 테오도라를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거나 카톡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정말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오빠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설날 즈음에 이미 죽어서 누워있기 시작했는데도 오빠라는 사람은 자신의 우울만을 챙기는 인정 없고 몰염치한 사람으로 씩씩하게 그리고 낭만적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봄이 찾아오면서 나는 더욱 바쁜 일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바쁘게 사는 것만이 죽음으로부터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테오도라가 죽어서 혼자 누워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물론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 그녀를 생각하였지만 꽃도 피기 시작하고 날씨도 화창한데 좋은 남자를 만나 바빠서 연락을 못하는구나!라고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하며 먼저 연락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가슴 아프고 미안하다. 모든 일은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 때문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면서 나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의 유일한 퇴로를 야무지게 틀어막고 숨통을 조인 장본인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모든 가족들 특히 어머니와 친오빠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였다. 자신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이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갔지만 나 또한 외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래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오빠가 가을쯤 한국에 와서 1년간 쉬며 지낸다고 생각하니 나름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아군이 생기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출발하기 전부터 카톡을 보내 언제 오느냐고 묻곤 하였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들어와서 4개월이 흐르도록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백수가 뭐가 그리 바쁘고 힘들다고 그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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