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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Oct 25. 2019

한국에서의 안식년은 유배였다

안식년 맞아? 그러다 과로사해 #2

한국에서 갑작스러운 1년의 안식년은 길고도 짧았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인생의 항로를 바꿀 수 있는 좌표도 설정하였다. 한마디로 나란 인간은 억세게 운이 좋다.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달도 아니고 1년 동안 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도 거창하게 1년의 안식년이라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안식년이란 유대교에서 시작된 용어로 알고 있다. 지금은 교수나 고위 공직자와 같은 전문직에서 안식년이란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7년 정도를 일하고 1년 정도의 재충전을 위한 휴직을 준다. 보통 그 휴직기간에는 해외로 나가 업무와 관련된 공부나 연구를 수행한다. 젊어서부터 나는 그 안식년이 너무 부러웠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전문직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블루칼라도 누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놀랍게도 부러워만 하던 특권을 내가 즐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교수나 고위공직자도 아닌 자영업자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주인 없는 사업장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질 뿐이다. 아무리 매니저가 주인을 대신해 운영한다고 해도 매니저도 주인은 아니다. 매니저도 직원이고 직원은 그저 직원일 뿐이다. 가족 같은 직원이란 말이 되지 않는다. 밥을 같이 먹고 일을 같이 한다고 직원이 가족이 될 수는 없다. 언제나 직원들에게 맡은 일만 충실하게 해달라고 주문한다. 절대 주인의식 같은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는다. 그 따위의 말은 지나가던 소도 비웃을 뿐이다. 차라리 주급을 지급할 때 10파운드짜리 하나 더 넣어주는 일이 100마디의 주인의식보다 힘을 발휘한다.    

  

그러한 나에게 안식년은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제임스의 죽음으로 필요성은 절감했지만 그렇다고 생업전선에서 1년 동안이나 벗어나 있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의 어떤 직원도 주인처럼 일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주인은 주인이고 직원은 직원일 뿐이다.      


심지어 아들 녀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영국에서 어나 영국에서 자랐지만 좀 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다. 가계에서 서빙 알바를 하면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정시에 앞치마를 벗고 가게를 벗어난다.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1분도 더 일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알바 비용은 정확하게 챙긴다. 무늬만 한국인이지 사고방식은 영국 놈 그 자체다. 영국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이니 탓할 수도 없다. 아무리 바빠도 초과근무는 없다. 만일 초과 근무를 시키려면 15분당 엑스트라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그것도 직원이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물론 아들은 한국으로 유학을 가서 여름방학 때만 영국 집으로 엄마와 함께 온다.  

    

한국의 여름은 너무 덥고 습해서 피서를 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질병으로 한국으로 유학을 간 것은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 시작되는 가을이었다. 그래도 엄마의 보호자를 자초하고 나선 아들이 늘 든든하고 대견하였다. 중학생으로 키워 논 보람이 있다고 하면 아들은 코웃음을 친다. 아빠가 뭘 키웠는지 의문을 제기하곤 하였다. 자기는 스스로 컸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3년간의 별거 기간 동안에 나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추가로 시작한 가계 근처의 백화점 내 초밥 가계도 정착을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마침 브렉시트와 겹친 것이다. 초대형 악재에 사업은 휘청거렸다. 그래도 사업이 힘든 것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배신감과 상처는 참는다고 참아지는 일이 아니었다. 특별한 약도 치료법도 없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못해 몸과 마음에 작고 미세한 개미구멍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 개미구멍으로 스며드는 물에 서서히 몸과 마음은 젖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3년을 버티다 보니 아들이 한국의 국제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일반학교를 보내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해 여름 중학교 과정이 끝나자 아내와 아들은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가을이 오기 무섭게 바통터치를 하고 꿈에 그리던 안식년을 시작하였다. 한국으로 날아와 서울 외곽의 어느 곳에 급히 둥지를 틀었다.     

 

지난해 한국의 가을은 길고 아름다웠다. 겨울에는 눈도 몇 차례 오지 않고 지나갔다. 물론 영국에 비하면 그 추위는 매섭고 혹독하였다. 봄이 오면서 나의 삶은 활기를 되찾았고 여름에는 더위로 꼼짝할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카페 족으로 변신해 글 감옥에 갇혀서 지냈다. 그리고 또다시 가을을 맞이하였다. 그렇게 1년이라는 안식년이 지났다. 그 1년의 생활들은 나의 항로를 바꿀 정도로 중요한 날들이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쓰러지거나 드러누울 수 없었다. 오히려 더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쳤다. 힘들 때마다 심장마비로 급사한 제임스 생각이 났다.      


처음 몇 달은 고생이 심하였다. 한국 생활에 대한 적응보다 힘들었던 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병원도 다니고 책도 읽고 술도 마시면서 무언가를 하긴 하였다. 하지만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나타나는 금단 현상 같은 어색함과 지루함은 서서히 편안함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침마다 출근하려고 서두르려는 몸을 마음이 제지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쉬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쉬면 쉴수록 오히려 불면증도 심해지고 입맛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한국의 맛 집 탐방은 을지로 노포 몇 개가 전부였다. 어디를 가도 그 맛이 그 맛이었다. 이렇게 1년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하기까지 하였다. 아! 쉬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거였어! 안식년 동안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년이 아니라 유배생활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지기 시작하였다. 해가 바뀌면서 드디어 좁고 답답한 보금자리를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어쩌면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쉬는 일이 가장 어려울 수도 있다. 둥지를 나선 새는 나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생전 처음 날아보는 비행에서 한번만 성공하면 평생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새끼 새가 비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는 곧 소멸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른 동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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