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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05. 2019

글을 쓰면 자존감이 물가상승률보다 가파르게 오른다

책을 쓴다니 지나던 소가 웃었다 #13 독서, 글쓰기와 자존감의 관계

자존감이 물가상승률보다 가파르게 오른다.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 자존감의 사전적 정의다. 요즘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만큼 자존감이 낮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존감이 높거나 낮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살아가면서 남의 눈치를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양아치나 망나니처럼 살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사소한 악플 하나에도 밤잠을 설친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불같이 버럭 화를 낸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에서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의미는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사람인데 왜 당신은 그것을 몰라주느냐!라는 원망이 들어 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다. 매주 한 권 책 쓰기 평생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의 나의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버럭 화를 내는 나 자신에 내가 더 실망하기 일쑤였다. 간헐적이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상습적이었다.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나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어쩌면 습관이 아닌 DNA에 내재되고 학습까지 된 최악의 단점이었다. 이는 가족, 특히 아내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나의 이러한 못된 기질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즉, 자존감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글을 쓰려면 치열한 자신과의 대화가 우선이다. 피해 갈 수 없는 글쓰기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 없이 독서나 필사에만 의존해서 쓴 글은 자칫 앙꼬 없는 찐빵이 되거나 영혼 없는 메아리가 될 수 있다.      


글쓰기가 주는 치유 효과는 바로 자존감을 높이는 작업이었다. 자신과의 대화를 매일 치열하게 해야만 매일 글을 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들에 대한 답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떠한 주제의 글을 쓰더라도 이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다. 글이란 결국은 나의 관점에서 쓰는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이 빠진 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글이란 태생적으로 자신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글이 아니면서 진솔함이라는 핵심을 담아낼 수는 없다. 심지어 치부까지도 드러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기도 하다. 그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치유가 자연스럽게 따른다. 글을 쓰지 않고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일은 없다.      


제 아무리 독서를 많이 한다고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낼 일은 없다. 간혹 천권이나 그 이상 읽었다고 자랑을 하는 글들을 접한다. 모든 분야를 섭렵했고 세상 이치를 앉아서도 볼 수 있는 혜안과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독서의 힘은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글까지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글이란 책 한 권 읽지 않고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작가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책을 내야만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일기나 몇 줄의 블로그만 꾸준히 써도 이미 작가라고 생각한다. 직업으로서의 작가와는 거리가 있지만 매일 글을 쓰다 보면 직업이 될 수도 있는 것이 글쓰기의 힘이다.      


매일 글을 쓰거나 매주 한 권 책을 쓰려면 24시간 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좀 과장된 이야기지만 꿈을 꾸면서도 글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올라간다. 그 올라간 자존감은 우울증 치료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우울이란 결국 자존감의 문제였다. 글쓰기 이전의 나는 항상 우울하였다. 나의 바닥을 친 자존감 때문이었다.   

  

“세상에 나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편은 없다. 나는 완전하게 고립된 개인에 불과하다. “

라는 생각은 이미 나의 자존감 자체를 무너트린 단계였다. 우울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렇게 자존감은 무너져 내렸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책 쓰기로 매주 한 권씩 써오면서 나의 자존감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어떤 악플이나 인신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나의 글이나 강의에 악플을 달아주면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한다. 무관심보다는 그래도 악플이 낳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연예인이나 기타 유명인들이 겪는 악플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달라진 나의 자존감은 우울증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 “



나의 좌우명처럼 사용되는 문구이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나의 글감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상이라는 곳을 향해 촉수를 더듬거린다. 그 촉수가 감지해낸 먹잇감들은 일단 꿀꺽 삼키고 본다. 그렇게 꿀꺽 삼켜진 먹이는 어느 정도 되새김질을 통해 다시 글로 배설해내는 과정이 나의 글쓰기 방식이다. 글감이 차고 넘치는 이유다. 글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글감을 먼저 사용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는 이유다. 그래서 매주 한 권 책 쓰는 일이 어렵지 않다. 오히려 즐거운 놀이가 되어버렸다.     



인생관이 바뀔 정도로 자신과의 치열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글을 쓰지 못하고 독서에만 의존하던 때에도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행위는 대화라기보다는 지식을 주입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굳이 글을 읽으면서까지 자신과의 치열한 대화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주입된 지식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며칠 또는 몇 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버렸다. 참으로 괘심 하였지만 그렇다고 독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몇 년 전에 읽었던 책들은 그 내용조차 생각이 나질 않았다. 독서에게 이러한 수모까지 당하면서도 독서를 멈추지는 못하였다. 독서를 하면 그 순간은 크게 깨닫는 바도 있고 없던 통찰력도 생기기 때문이었다. 독서가 주는 즐거움은 차고 넘쳤다. 주어진 시간을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사용했다는 뿌듯함은 그 어떤 취미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혜안과 통찰력이라는 착시 현상도 무서웠다.      


문제는 자꾸만 시간을 도둑맞는 그 기분이었다. 매 연말이면 성스러운 연례행사처럼 읽었던 삼국지조차 그 내용들이 가물거렸다. 10번 이상을 읽었지만 삼국지가 주는 교훈은 그때 뿐이었다. 그 많은 등장인물도 주인공 몇 명만 생각이 났다. 점차 시간이 아까워졌다. 그래도 더욱 집중해서 책을 읽었지만 역시 시간과 함께 읽었던 내용들은 함몰되어 갔다. 책 속에 모든 길이 있다는 신념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제목과 목차만으로도 충분했다. 완독이 주는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 쓰기는 달랐다. 오늘까지 36주째 36권의 책을 쓰면서 책 제목만 대면 그 내용들을 똑같이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다시 쓸 수 있다. 바둑으로 치면 복기가 가능하였다. 그만큼 치열한 자기 대화가 먼저 이루어진 다음에 글을 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둑도 마찬가지다. 한 수 한수를 둘 때 혼신을 다한다. 물론 바둑에도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바로 정석이라는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 어떤 정석을 선택했는지 만 기억해도 쉽게 복귀가 가능하다.      


책 쓰기도 마찬가지다. 제목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이 목차다. 목차는 빌딩의 구조물과 같다. 그래서 목차만 잘 설정하면 책 한 권 써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교보문고에 가도 책 한 권을 완독 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 시간에 100여 권의 제목과 목차를 본다. 가끔 필이 오는 책은 프롤로그를 읽고 구입한다. 이처럼 책에도 바둑처럼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그 길이 바둑의 정석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다.      


몇 천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무림의 고수들은 결코 입으로 자랑하는 법이 없다. 독서는 독서대로 글쓰기는 글쓰기대로 하면 된다. 중요한 점은 둘 다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즐겨야 한다는 의미는 좋아해야 한다. 그래야 취미나 놀이처럼 평생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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