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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08. 2019

시골 할머니들은 평생 독서토론 중!

책을 쓴다니 지나던 소가 웃었다 #16 문장력과 다독의 함정

문장력은 전문 작가들의 몫     


책 쓰기 강의 도중 많이 듣는 또 하나의 질문이 바로 문장력에 관한 질문이다. 여러 책 쓰기 강의를 전전하지만 이분들이 아직 책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을 쓰기도 전에 문장력부터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책 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장력이 없는 사람들이 더 좋은 글을 쓸 수도 있다. 사실, 문장력이 있는 글들은 과대 포장된 선물상자와 같다. 중요한 것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선물이다. 선물은 보잘것없는 작은 머그컵 하나인데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상자를 받을 때의 기분과 그 상자를 뜯어 선물과 대면할 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물론 상자 안의 선물도 좋고 포장까지 훌륭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의 글쓰기에서 처음부터 이 둘을 함께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설명했던 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옹알이도 하지 않고 말부터 하려는 것이다. 넘어져보지 않고 자전거를 배우려 한다.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이론으로만 수영을 배우는 일이다. 1층도 지을 능력이 없는데 100층짜리 빌딩을 한꺼번에 지어보려는 욕심이기도 하다. 문장력은 글을 쓰고 책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긴다. 따로 공부한다고 단순히 책을 읽는다고 생기지 않는다. 매일 쓰고 또 쓰다 보면 저절로 따라오는 덤이다. 직장인들이 명절이나 연말에 받는 상여금 같은 것이다.     


물론 전문 작가의 문장력을 흉내 낼 수도 있다. 필사 등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문장력을 흉내 낼 수는 있다. 그러다 보면 글은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알 수 없다. 표절은 그만두고 정체성이 없는 남의 글이 되고 만다. 글에는 반드시 나의 주관이 개입되어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을 쓰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아집을 써서는 안 된다. 생각을 정제하는 작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자신과의 치열한 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 과정을 거치다 보면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처음부터 문장력을 탐하는 일은 전문 작가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수의 글쓰기 교실이나 책들에서는 문장력까지 가르치려 하거나 실제 가르치고 있다. 이 또한 소비자인 독자의 판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자칫 나의 아집이 될 수도 있는 민감한 사항이다. 따라서 어느 방법이 옳은지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그 일은 소비자인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기 때문이다.             

                                      


다독의 함정과 무독의 풋풋함    

 

글쓰기 책이나 교실에서 저자나 강사들이 가장 강조하는 포인트 중 하나가 바로 다독이다. 몇 천권부터 만권 이상까지의 독서량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내세운다. 참고로 나도 독서량이라면 누구에게 빠질 정도는 아니다. 20년간 읽은 책을 다 합하면 놀라운 숫자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숫자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놀랍게도 다독에는 무서운 함정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 함정을 한번 파헤쳐보자.    

 

앞에서도 논하였던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해마다 12월이 되면 다른 책들을 덮어두고 오로지 삼국지를 완독 했다. 거의 매년, 이민생활의 성스러운 의식처럼 말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삼국지만 한 책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삼국지처럼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책도 흔치 않다. 문제는 그렇게 해마다 한 번씩 읽는 책이라면 그 내용들을 줄줄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말이 10번이지 어려서도 만화책으로도 여러 번 읽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내용들을 생각해보면 오락가락한다. 물론 나의 기억력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요 인물과 나라들 정도만 생각이 난다. 그리고 곳곳의 전투 장면들이 맞추다 포기한 퍼즐처럼 어지럽게 엉켜있다. 물론 제갈공명의 적벽대전과 동남풍 정도의 명장면들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삼국지도 이러한데 하물며 한번 읽은 다른 책들은 어떠할까? 그래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지도 모른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어떤 책인가요? “ 그러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뭇거린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래전 읽은 책들의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에 읽은 책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감명 깊었던 책이 한두 권이 아니었다. 많은 훌륭한 책들이 울림을 주었고 감동을 선물했다.      


나의 경험으로는 독서는 독서일 뿐이다. 책 쓰기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의미다. 세상에 독서를 게을리 한 작가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독서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거의 매일 쓰고 또 썼다. 치열한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 대화가 막힐 때는 절필까지 해가며 심기일전하며 썼다. 2,400년 전의 공자와 2,300년 전의 맹자가 아직도 살아서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에게 제사라는 예를 지내게 하고 충과 효를 강요하고 있지 않는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서 생물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사상이 글쓰기를 통한 책의 형태로 남겨져 있지 않았다면 세상은 물론 우리의 문화와 관습도 지금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생활을 알차게(?) 보내셨다. 그 험난한 시절을 좌절과 절망으로만 흘려보내지 않았다. 유배를 당하지 않았으면 나오지 못할 수많은 명저를 남기셨다. 아무도 그분의 독서량이나 독서법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분의 저술만도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 350권이 넘는 저서를 펜이나 노트북이 아닌 붓으로 써냈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혼을 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분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책을 쓰기 벅찰 때마다 팔당댐 위의 그분의 생가를 찾는 이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지난해 한국에 와서 처음 거처를 잡은 곳도 남양주 다산 선생의 생가 인근이었다. 남도 여행 때마다 들른 곳도 강진의 다산초당이었다. 다산 선생의 외가 윤 씨 후손들과의 대화도 책 쓰기에 힘을 실어 주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주옥같은 명저를 남기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나 유명 작가들의 책이 아니었다. 바로 한국의 70대와 80대 노인들의 시집과 산문집이었다. 막 한글을 배우고 나서 쓴 일기 같은 산문과 시들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분들의 독서량은 안타깝지만 0권이다. 글을 모르는데 어떻게 독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분들이 글을 깨우치고 쓴 글들에는 생명이 꿈틀거렸다. 가식과 허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화장 끼 없는 민낯 정도가 아니었다. 여름날 뙤약볕에 검게 그을린 맨얼굴 그대로였다. 유명 작가들이 한 페이지 넘게 묘사할 장면들은 한두 단어로 묘사되어 있었다. 어떠한 치장도 군더더기도 없는 글은 새로운 울림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산문이나 일기 형태의 글이 진한 세월과 연륜이 담긴 시로 다가왔다. 몽당연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언어들은 어떤 시인의 그것보다 감동적이었다. 간간히 잘못 쓰인 맞춤법은 나의 입가에 미소를 불러와 잔잔한 울림을 더해줬다.       


사실 그분들에게는 독서보다 강력한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평생 동안 TV 연속극 시청이라는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고 다리와 문이 달린 흑백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그분들만의 독서법이었다. 연속극을 보고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어김없이 독서토론이 이어졌다.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에서는 요즘 우리가 하는 독서토론보다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편이 갈리기까지 하였다. 방송작가가 아니어도 연속극의 대본이 얼마나 치열하게 쓰이는지 알 것이다. 시청률과 직결되기 때문에 연속극 대본만큼 피 말리는 글이 없다. 물론 영화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골 노인들이 영화를 보는 일은 좀처럼 없기 때문에 영화는 논외로 하자.      


읽다 말다를 반복하는 어설픈 독서보다도 꾸준한 연속극 시청이 훨씬 효율적인 독서법일 수 있다. 시각에 의존하는 독서에 비해 시청각에 의존하는 연속극은 그 여운도 오래간다. 30년 전의 전원일기나 수사반장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치열한 대본의 힘과 시청각의 힘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책 한 권 읽지 않은 독자들도 좋은 책을 쓸 수 있다. 좋은 책이란 쉬운 언어로 진솔하게 쓴 책을 말한다. 가식과 치장을 걷어낸 솔직하고 담백한 글이야말로 독자들이 원하는 책이다. 정보가 우선이라면 굳이 책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검색엔진만을 이용해서 논문 형태의 정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넘쳐나는 빅 데이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책을 통한 어설픈 정보제공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처럼 책도 점점 시대를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의미 없는 독서보다는 한 줄이라도 직접 쓰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아이가 말을 시작하기 전 옹알이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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