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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Nov 15. 2019

그는 런던 최초 화전민이었다.

미스터리(Mr. Lee) #2. 런던, 고향이 되기까지

 

“이민 초기,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     


20년 전 가을날이었다. 그해의 10월에도 마지막 밤이 있었고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친 다음날 아침 그는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전격적인 이사를 단행하였다. 이사 갈 동네는 송파 풍납동에서 영국 런던의 어디쯤이었다. 그 이상은 그도 그의 아내도 모른 채 떠났다. 무작정 떠난 이사 같은 이민이었다. 담보는 아내 뱃속의 아이 하나뿐이었다. 그는 가진 재산이라고는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가 전부였다. 한국에서 정리하고 말 재산이 없었다. 마이너스 통장은 보험과 적금을 깨서 겨우 플러스로 돌려놓았다. 마이너스와 플러스는 마치 그의 인생 같았다.     


이민 초기는 우왕좌왕과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뭐가 돼도 될 놈이라는 믿음 하나로 영국이라는 나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어학연수 시절의 낭만적이고 허술해 보이기까지 하였던 영국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함경도나 강원도 산골의 화전민이 따로 없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손바닥만 한 땅도 허락되지 않았다.  산에 불을 내서 삽과 괭이로 밭을 일구고 감자나 옥수수라도 심어야 했다. 그는 런던에서 화전민처럼 살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점은 그가 화전민 못지않게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동네북처럼 한국의 사업가들에게 이리저리 당하고도 건재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가진 것이 없다는 현실이 그를 안도하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난이라는 적은 친구가 되어갔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그를 헷갈리게 하였다. 좌절과 절망에서도 희망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만일 재산이라도 좀 있었더라면 탈탈 털렸을 것이다.      


실제로 재외국민들의 한인 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 사기 사건이다. 먹고 튀는 일이 여행사나 유학원은 물론이고 부동산중개소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일단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다른 나라로 튀면 잡을 재간이 없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잠잠해지면 다시 슬며시 돌아오기도 한다. 경제사범의 공소시효를 없애야 하는 이유다.     


그는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판단하고 이전처럼 자신의 길을 가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비자가 문제였다. 영주권을 신청하려면 work permit 비자로 4년을 버텨내야 한다. 나중에 결과적으로 5년으로 늘어나서 고생을 하였지만 어쨌든 더 이상 학생비자로 버틸 수도 없었다. 아이도 커가고 하루빨리 신분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그 자신의 회사를 설립해 사업을 하고 실적을 올려야만 했다. 신분 상승이라는 것이 사실 별거 아니었다. 합법적인 체류 비자를 가지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신분 상승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촉수는 예리하였다. 오래전 사업을 시작하면서 영국이 EU와 결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니..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비자를 해결하지 못해 돌아가고 있었다. 헤매다 비자 관련 법들은 까다로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라면 언젠가는 영국이 EU와 결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먼저 와서 민박집을 운영하던 후배 부부도 비자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후배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웠지만 그에게는 진한 전율로 다가왔다. 그는 기어코 비자를 쟁취하리라 다짐하였다. 그의 조상이 조선 후기 삼정이 문란할 때 양반 족보를 샀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사코 부인하지만 그의 타고난 촉수를 속일 수는 없다. 후배 부부는 떠나가면서 선배인 그의 사전에 단어 하나를 추가해 주었다. 포기는 없다.라는 단어다. 그래서 그는 영주권을 따내기까지 포기김치도 먹지 않고 살았다.   


회사 설립과 법인계좌 오픈


그들 후배 부부가 돌아가던 그다음 주에 그는 무작정 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의 축구 모임 회원이기도 한  회계사를 찾아가 그날 당장 회사를 설립하였다. 학생비자 신분의 배우자는 full time으로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회사 대표는 그의 아내가 되어야만 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매니저로 강등되었다. 주주는 놀랍게도 한국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로 등재시켰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이 전혀 사실을 모른다. 아들 부부가 영국으로 유학을 간 줄 알고 계셨다. 그것도 직장에서 보내주어서 말이다.      


회계사 사무실에서 3일 만에 연락이 왔다. 회사 등록증이 나왔다고 받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기쁨도 잠시였다. 회사 등록증이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첫 번째로 할 일이 사무실을 얻어야 했다. 영국 회사의 가장 기본은 사무실과 주소였다. 그래서 실제로 사무실을 렌트하였다. 그리고 그 사무실에서 사업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다음 회사 계좌를 오픈하였다. 바클레이 은행에서 한나절의 면접을 통해 겨우 열었다. 자기네 은행 이용해주겠다는데 갑질도 그런 갑질이 없었다. 여차하면 은행계좌를 못 열 뻔한 고비도 있었다. 다행히 그의 아내의 유창한 영어 덕분에 고비를 넘기고 법인 명의의 은행계좌를 오픈시켰다. 허술한 나라인 줄 알았던 영국과의 샅바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은행계좌 하나 여는데 한국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조서를 꾸미는 줄 알았다.  

    

대망의 work permit 비자를 신청하다.


그다음 절차는 그토록 고대하던 대망의 work permit 비자를 신청하는 것이었다. 비자는 4년짜리인데 보통 2년짜리를 먼저 준다. 2년이 지난 후 실적을 보고 나머지 2년짜리를 줄지 말지를 판단하겠다는 의도다. 그의 회사처럼 쥐뿔(?)도 없는 경우에는 2년이 아닌 1년 반짜리를 준다. 실적을 보고 2년 반짜리를 줄지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회사를 설립하고 은행을 트고 사무실을 계약하는 과정은 일사천리도 진행되었다. 그의 아내가 자랑스러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놈의 영어 때문에 주도권을 뺏겨 앙심을 가지고 있던 그였다. 밴댕이 속을 닮은 그가 꿍하고 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 그조차도 아내의 일처리 능력에 입이 떡 벌어졌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은 그는 집에서 육아를 담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사무실은 한인타운 내의 비즈니스 센터에 입주하였다. 실제로 이용하지 않지만 사무실답게 꾸며 놓아야 했다. 당시 명품 사업을 시작해서 사무실에 명품들을 보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사무실은 반드시 필요하였다. 이민국 직원들이 볼 때 페이퍼 컴퍼니를 선별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사무실의 존재 여부와 실적이다. 문제는 항상 사무실이었다. 실제로 사업은 하지만 사무실이 필요 없는 그로서는 항상 사무실 유지가 문제였다.      


이민국과의 술래잡기와 비자법의 숨 가쁜 변천사 그리고 선견지명


사무실은 세 번을 이사하고 이민국에서도 몇 번을 들이닥쳤다. 들이닥치기 전에는 레터를 먼저 보낸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사무실에 매일 가서 우편물을 체크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1차 경고 레터에 답이 없으면 그다음은 기습을 해서 들이닥치거나 2차 경고 레터를 레지스터드 오피스에 보낸다. 그 오피스는 회사를 설립해준 회계사무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1차 1년 반을 넘겼다. 나머지 2년 반짜리 비자 한 번만 더 받으면 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총 4년에서 5년으로 1년 연장이 되었다. 비자법이 매년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그는 불안하였다. 2년 반짜리 비자를 받고도 1년짜리를 한 번 더 받아야 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왜 하필 비자법이 그때 바뀌어서 그를 괴롭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work permit 제도 자체가 통째로 사라졌다. 스폰서 제도로 바뀌면서 사실상 관광비자나 학생비자 신분으로 사업은 원천 봉쇄되고 만 것이다.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2년만 늦었더라면 그의 무 대포 이민은 좌절되고 그 후배 부부처럼 쓸쓸하게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work permit 비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실적이었다. 어쩌면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먼저 시작한 사업이 바로 고부가가치의 명품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고가의 명품이 실적을 쌓기에는 가장 쉬었다. 마침 한국과 일본에 명품 붐이 일던 시기와도 맞아떨어졌다. 심지어 고등학생들까지도 이 붐에 합류하였다. 버버리 반팔 폴로 티나 체크 운동화의 고객은 대부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손님이었다. 버버리 쇼핑몰을 운영하며 구매대행 서비스도 병행하였다. 사실 판매를 해도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부가가치세 환급으로 그럭저럭 버틸 만하였다. 부가세 환급은 매출 사실을 수출송장과 함께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실적이었다. 문제는 이민국보다 국세청에서 먼저 터졌다. 그 범인이 바로 과도한 부가세 환급신청이었다.      


참고로 영국에서의 회사 설립 절차는 간단하다. 회사가 잘못되어도 대표가 책임지지 않는 리미티드 컴퍼니를 설립하면 된다. 사업에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개인에게 연대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고의 파산을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영국 정부에서는 회사 설립에 제한이냐 규제를 두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사업하기 좋은 나라 중 하나가 영국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영국행 또한 선견지명이 있었다. 뭐가 돼도 될 놈에게 그런 선견지명이 있으리라고는 그 자신도 몰랐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가 이민 초기에 겪었을 모진 세월을 그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돈키호테처럼 그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사람이었다. 매력이라고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각도와 방향을 아무리 바꿔도 찾아볼 수 없는 그였다. 그러한 그에게도 돈키호테 같은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결혼 후에도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일단 저질러 보는 돈키호테와 같은 인간을 남편으로 데리고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는 그의 아내 심정도 이해가 간다. 어쩌면 그의 아내가 병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의 촉수는 틀리지 않았다. 먼 훗날 영주권도 받고 경제적인 여유도 생기면서 그의 아내에게는 무서운 질병이 찾아온다. 그래서 그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운명이라고 우기기엔 그의 일방통행과 역주행의 과실이 더 컸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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