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년간의 영국 여행 이야기
이사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초라한 짐들이었다. 작은 가방과 박스 몇 개가 전부였다. 민박집주인 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1주일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만으로도 이렇게 정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리 만큼 우리는 이미 친해지고 정이 들어있었다. 비슷한 연배라는 점도 한몫하였다. 하지만 이민생활 초창기의 고단함과 이민생활 전반에서 오는 외로움을 알기에 그렇게 잘해주신 듯하다.
미니캡으로 가방을 싣고 새로 구한 플랏으로 향했다. 민박집에서 20분 정도의 거리였다. 도착해서 짐을 내리자마자 다시 후배 민박집으로 향하였다. 거기에 두고 온 나머지 이민가방들을 가져와서 2층으로 이민가방을 올리는 작업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임신한 아내가 돕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가방 4개를 옮기고 나니 겨울인데도 땀이 흘렀다.
짐을 2층 거실과 부엌으로 옮긴 후 정리는 아내가 도맡아서 하였다. 문제는 소파와 침대 외에는 아무런 가전제품이나 가구가 없었다. Unfurnished flat이었기 때문에 렌트비가 쌓던 것이다. furnished flat이나 house는 웬만한 가전제품과 가구가 다 갖춰져 있다. 따라서 가구와 가전제품이 갖추어진 집들은 살기 편리하고 좋지만 월세가 그만큼 올라가는 게 문제였다.
일단 짐들을 풀어서 한쪽에 제쳐둔 후 Argos에서 하얀 천으로 된 조립식 장롱과 서랍장을 사 왔다. 당장 덥고 잘 이불과 베개도 같이 사 왔다. 급한 대로 이사 후 첫날밤은 넘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첫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싸구려 침대 매트리스가 너무 푹신 거려 허리가 아팠다. 그건 참을 수 있었는데 길가의 상가 플랏이다 보니 지나가는 차들의 엔진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소리에 민감한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특히 새벽에는 차들이 더욱 쌩쌩 달려서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옛날 방식의 플랏들은 이중창 구조가 아니어서 방음에 아주 취약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1주일이 넘어서자 어느 순간부터 차들의 엔진 소리가 작게 들리지 시작하더니 몇 주 후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진화론이 정말 맞긴 맞나 보다!!!
이사 후 집을 꾸민다는 개념보다는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갖춰가는 일들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일요일마다 열리는 벼룩시장들은 거의 헐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필요한 것들을 갖춰갈 수 있게 도와준 일등공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나와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진열해 놓고 파는 것이 벼룩시장이다. 물건을 팔고 가격 흥정을 하는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려서부터 작은 몇 푼의 푼돈을 버는 일이 얼마만큼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산교육의 현장이 바로 벼룩시장이다. 물론 벼룩시장에는 전문 상인들도 많다.
벼룩시장을 열심히 다니다 보면 가끔은 골동품이나 진귀함 것들도 몇 파운드에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문제는 골동품을 보는 안목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내 눈에는 모두 가치가 나가는 골동품처럼 보이지만 잘못 살 경우 쓰레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 기회의 장소여서인지 일요일만 되면 자연스럽게 벼룩시장을 찾는 단골들이 많다. 어느 날 문득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처럼 벼룩시장의 달콤한 유혹은 중독성이 강하였지만 나의 안목 없음을 한탄하며 담배 끊듯이 어느 날 벼룩시장을 끊었다.
이렇게 거의 대부분의 신혼살림이나 다름없는 생활필수품들을 벼룩시장을 통해 조달해 나가면서도 즐겁고 행복하였다. 나에게는 창창하고 밝은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만의 힘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 당당하고 좋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난이라는 현실이 싫지 않았다. 자신이 초라하거나 비참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물론 여자인 아내의 입장은 달랐겠지만.....,
이사 후 대충 짐 정리를 마치고 나니 거실이 좀 허전하였다. 틈나는 대로 이것저것 생필품들을 부지런하게 사 날랐다. 제비가 박 씨 물어오듯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장만해 나가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물론 대부분 벼룩시장을 통해 사들인 중고였거나 가격이 저렴한 제품들이었다. 데스크톱 컴퓨터도 가격이 저렴한 조립품을 마련하였다. BT에 랜드 라인 전화와 인터넷도 신청하였다. 당시에는 인터넷을 BT 전화선과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와이파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며칠 지나자 거실이 허전한 이유를 발견하였다. 바로 TV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작고 싸더라도 새것을 사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중고 TV를 사기로 하고 광고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싸고 괜찮아 보이는 TV를 찾아내서 판매자와 통화를 하고 픽업하러 갔다.
지역은 윔블던을 한참 지나 런던 시내에 근접한 Tooting Broadway라는 곳이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도착했는데 문제는 버스 정류장에서 판매자 집까지 거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TV도 생각보다 크고 무거웠다. 지금의 평면이 아닌 20년 전의 TV 이를 상상해 보시라!!! 막상 TV를 사서 버스정류장까지 옮기는 일이 문제였다. 한아름에 안아지지도 않고 굴리거나 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트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임신한 아내가 도울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아무튼 TV를 버스 정류장까지 옮겨서 다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집에까지 왔다. 버스번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131번과 65번 버스였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 2층으로 올리는 마지막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계단에서 굴리다시피 TV를 거실까지 올리고 나는 완전히 큰 대자로 누워버렸다. 그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내가 가난해도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으면 이렇게 불편한 것이구나를 온몸으로 느꼈다.
셰어를 할 방의 TV 2대는 일요일 벼룩시장에서 작은 걸로 샀다. 그 일을 계기로 TV에 한이 맺혔고 성공하면 TV부터 최신형으로 바꾸리라 다짐했다. 얼마 전에도 멀쩡한 TV를 놔두고 신모델의 대형 TV로 바꾸었다가 아내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TV까지 갖추자 제법 살림하는 집처럼 보였다. 이제는 GP등록을 하고 플랏 셰어 광고만 하면 대략 정리가 되는 모양새였다. 아내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기 때문에 GP등록이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