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너도 내가 처음이지? 2화. 죽을 용기
“죽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용기가 없었고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다. 그것도 하나의 삶이고 인생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아내의 관심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아이가 좀 자라고 숨통이 트이면서 관심이 돌아올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떠나간 버스는 막차였다. 아내가 타고 있는 막차에서 사랑은 머뭇거리다 버스와 함께 멀어져 갔다. 한줄기의 희망마저 좌절과 절망으로 변하였다. 막차가 떠난 공간은 공허하였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집요하게 그 공간을 매우기 시작하였다. 좌절과 절망마저도 밀어내고 있었다. 그의 몸은 스트레스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트레스의 위력은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몸의 여기저기서 구조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렸다. 이유도 원인도 모른 채 전쟁을 치르면서 구원병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구원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겨우 40대 중반의 가장에게는 날벼락같은 일들이 터지고 있었다.
“불행은 순서대로 오지 않고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잔인함에 대항해 처절하게 맞서라는 선전포고도 없었다. 100세 시대의 절반도 살지 않았는데 너무 이른 공격들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받은 가장 큰 스트레스는 물론 아내와의 관계였다. 한번 멀어진 아내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그의 아내도 자포자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막차는 떠나가고 남은 건 빈 껍데기뿐이었다. 허상인지 허수아비 인지도 알 수 없는 허무였고 상실이었다.
부부가 같은 공간에 살면서 남처럼 살아가는 일처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차라리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래도 견딜만하다. 한 지붕 아래서 매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사이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대로 성실하였고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뿐이다. 먹고살기 위해 고생도 많이 하였다. 경험이 없는 몸 쓰는 일들을 하면서 후회도 많았다. 너무 힘들어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일 또한 그의 몫이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는 사실을 런던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이 자상하고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그 또한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눈 한번 질끈 감고 입술 한번 깨물면 그만이다. 생면부지의 타국에서 먹고 산다는 일은 순간과 상황을 견디는 일이었다. 언제 올지도 모를 기회를 위해 그저 의미 없이 하루를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가정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겉으로는 매일 평화로웠고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도 안정되고 아이도 자라면서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이 얼쩡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행복은 말랑말랑한 것들이었고 사방에서 뒹글 거리고 있었다. 런던의 계절은 아름다웠고 언제나처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절반의 우울과 절반의 찬란이 반복되었다.
“아내가 옆방으로 이사하다! “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내가 이상해졌다. 그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각방을 쓰기 시작하였다. 며칠 저러다 말겠지! 하며 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각방은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그 또한 아내를 배려한다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문제제기와 배려도 구분하지 못한 못난 남편이 되었다. 문제가 있으면 참지 말고 싸워서라도 해결해야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육 두 문자는 고사하고 야! 소리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툭하면 밥상을 뒤집어엎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아버지처럼만 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이의 제기가 없자 너무도 자연스럽게 각방에 익숙해져 갔다. 한집에 계속 사는 의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아내의 마음이 그때부터 이미 떠나갔던 것이다. 만일 아이가 없었더라면 그 당시에 벌써 이혼하자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아직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이 때문에 그의 아내는 각방의 형태로라도 가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유추해볼 뿐이다. 부부 사이에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미련 곰탱이가 따로 없었다.
”하차 벨은 눌렀지만 사랑은 내리지 못한 채 막차가 떠나다. “
그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내가 갑자기 각방을 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내는 서서히 찬바람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겨울에도 에어컨이 따로 없었다. 소 닭 보듯 하는 한 지붕 두 가족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때라도 용기를 내어서 속내를 꺼내 들고 대화를 시도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무서웠다. 어떤 대화로든 아내의 논리를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참기로 하였다. 그는 서서히 미소를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아내로부터 사랑을 잃은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스트레스로 몰려왔다. 몸의 여기저기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우울감이 최전방을 맡고 뒤이어 통증들이 몰려왔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멀쩡하던 세상에 갑자기 태양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랑이 삶의 원천인 태양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지만 이미 막차는 떠나가고 없었다.
태양이 사라진 대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삶은 어느 날 멈춰 선 시계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은 그를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외로움이 파도처럼 들락거렸고 부서지는 파도에 몸은 아파왔다. 비상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그를 향해 난 문은 없었다. 비상문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서 잠깐만이라도 도피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우울은 점점 더 깊게 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공격은 집요하다 못해 잔인하였다. 그럴수록 더욱 지원군이 필요하였다. 그렇다고 남처럼 지내는 아내에게 우울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녀로부터 시작된 우울이었기에 더욱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좁은문의 유혹”
마지막 남은 좁은 문이 있기는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문을 통과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였다. 그 문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방법까지 머리에 그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쉬운 것은 없었다. 용기를 내야만 했다. 그의 아내를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야 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복수하는 길이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그가 죽는 일만큼 극적이고 통쾌한 복수는 보이지 않았다. 우울이라는 감정은 뱀의 혀보다 더 집요하게 그를 유혹하였다.
너 하나만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 더 이상 허수아비처럼 살 필요도 없다. 요단강만 건너면 외로움도 고통도 원망도 없는 아름다운 낙원이 펼쳐질 것이다.
뱀은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머리를 빳빳하게 든 채 짧고 가느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그 날름 거림 속에는 온갖 미사여구가 숨어있었다. 달콤하다 못해 화려하였다. 뱀의 맑고 촉촉한 눈망울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외롭고 고독한 그가 마다할 이유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 죽음은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설계도가 그려진 상태에서 본격적인 집을 지어가고 있었다. 그 집은 굳이 크거나 아름다울 필요도 없었다. 그 한 몸만 들어가서 두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언제든 상관없었다. 잠깐이면 되는 일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친구 하나 없었다. 떠나기 전 한 잔 마시며 푸념이라도 하고 싶었다 “
문제는 용기였다. 죽으려면 그토록 큰 용기가 필요할 줄은 미처 몰랐다. 몇 년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는 항상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라도 곁에 있으면 죽기 전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죽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만이라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였다. 맥주라도 한잔 마시며 하소연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친구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경계인이 되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길 바랬지만 세상에는 그 혼자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