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아니 청년이 왔다!

아빠는 아직도 산타를 믿어! #1

by 런던남자
설렘이 모여 사랑이 된다


나는 흥분하였다. 말초신경들은 일제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슴이 떨리고 심장박동수가 올라갔다. 마음이 셀레인다는 것이 이런 거였다니 신기하다. 너무도 긴 시간 동안 설렘을 잊고 살아왔다. 잊었다기보다는 설렐 일이 없었다. 제법 큰돈을 만져도, 몇 가지 사업을 해도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행복보다는 불안이 먼저 진을 치고 기다렸다. 아내와의 짧은 연애기간이 떠올랐다. 일산에 살던 시절이었다. 지리산 자락의 구례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저녁도 같이 먹지 못하고 돌아오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두 시간 남짓 얼굴 보려고 일산에서 지리산을 부지런히 다녔다. 그때 그 먼 거리를 달리게 한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셀렘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설렘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설렘들의 총합이 모여 사랑을 완성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마침내 비행기가 내렸고 시간도 멈추었다.


12월 20일 08시 50분, 영국항공 BA0017편은 12시간의 지친 날갯짓을 멈추고 인천공항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비행기 착륙시간에 맞추어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영종대교에는 이미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햇살이 이처럼 친근하고 다정해 보이기도 처음이다. 다리의 미세한 흔들림이 감지될 정도로 촉각들은 들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더욱 설렘이 요동친다.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International Arrivals로 향하였다. 공항의 아침 기온은 영하 2도였다. 영종도에 위치한 공항에는 바닷바람이 파고들어서인지 귀가 따끈 거리고 손이 시리다. 청사에 들어서기 무섭게 국제선 도착 전광판을 확인하였다. 예상대로 비행기는 정시에 내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감사인사를 하였다. 기장이었는지 정체불명의 신이었는도 모른 채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나오는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될 것이다. 바로 옆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하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면 커피맛을 느끼지 못하기 시작하였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지 못한다. 잇몸이 좋지 않아 이가 시린대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셔댄다. 아이스 아메리카를 단숨에 마실 정도로 목이 말라 있었다. 집에서 겨우 40분 거리인데도 그새 목이 탔던 모양이다.

입국장 멀리서부터 아이가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미물들에게까지 감사하는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다.


30분이 지나자 멀리서부터 이이가 나오고 있었다. 훌쩍 자라서 이젠 제법 청년 티가 난다. 아이가 혼자서도 장거리를 다닌다는 기쁨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아이는 두리번거리며 아빠를 찾고 있었다. 아빠는 한 걸음에 달려가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빠보다 훌쩍 커버린 아이에게서 나와 아내의 향이 났다. 아직도 사춘기여서 외모에 신경을 쓰는 아이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아직 엄마와 아빠의 관계의 변화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어차피 몇 달 후면 18세가 된다.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현명하게 처신해준 아내가 고마웠다. 가족이라고 모든 정보를 공유할 필요는 없다. 특히 아이에게 부모로서의 책임은 우주보다 넓고 태양보다 뜨겁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부모가 느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이혼한 시점부터 새로운 아빠의 역할을 찾는 중이다. 아내에게도 결혼생활 중 못해준 것들을 챙겨볼 생각이다. 물론 아내가 아닌 친구로서 말이다. 이혼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일뿐이다.


아이와 1년 반만의 상봉은 인생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아이가 선물이 되어 아빠를 보러 한국까지 날아온 것이다. 영국의 학교는 겨울방학이 2주밖에 되지 않는다. 그 방학을 할애하여 한국에 온 것이다. 아내와 아이에게 감사할 뿐이다. 인생에서 두 번의 설렘을 맞보게 한 장본인들이다. 가족은 깨질 수도 있다. 부부가 오래 살다 보면 부딪치는 일이 점점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다. 나는 불행하게도 후자에 해당하였다. 그렇다고 아내와 아이에게 소홀할 수는 없다. 비록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어도 한 아이의 엄마이고 아빠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하지만, 아이가 곧 독립을 하지만 여전히 가족으로서 유효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혼 자체는 문제가 없다. 이혼을 바라보는 시각도 각자가 받아내야 하는 삶은 무게다. 중요한 것은 부부 자신들이지만 아이들의 인생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혼 후에도 가정을 돌볼 생각이다. 런던에서 혼자 살아나갈 아내를 직접 챙기지는 못해도 죽을 때까지 친구로서 지내고 싶다. 용서할 일들은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할 일들은 용서받지 못한 채 가고 싶다. 이미 이혼한 마당에 용서가 가지는 의미는 퇴색되기 마련이다. 이제부터라도 결혼 생활중 못다 한 배려를 해주고 싶다. 그 배려가 매번 왜곡되었지만 아내가 아닌 친구로서의 배려까지 왜곡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태양마저 흥분하였다. 태양으로부터 8분 19초 전에 출발한 빛들에서 태양의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를 태우고 인천공항 주차장을 나섰다. 지하주차장을 나오기가 무섭게 태양으로부터 8분 19초 전에 출발한 빛들과 조우한다. 태양마저 흥분하였다. 추운 겨울날 장대비 같은 햇빛을 영종도로 아낌없이 보내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분명 영종대교를 건넜다. 하지만 나는 바다도 영종대교도 보지 못하였다. 옆좌석의 아이와 수다 때문에 그 웅장한 영종대교와 서해바다를 깜박하고 말았던 것이다. 설렘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포로 향하는 고속도로에도 태양은 부지런을 떨었다. 8분 19초 단위로 아침햇살을 보내느라 분주하였다. 온갖 질병과 싸우는 우울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도착하는 날 아침 비나 눈이라도 내리면 곤란하였다. 안개도 끼지 말아야 했다. 아빠가 아프다는 걸 아이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아빠가 한국에서 활기차고 멋지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가 아빠의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 질병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사는 아빠의 생활 자체는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아이의 성장을 보면서 세월을 생각해본다. 세월은 두 얼굴을 가지고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아이와 짐을 풀자마자 한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이의 제안이었다. 아빠가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 궁금했나 보다. 장시간의 비행시간이 지루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가 세 살 무렵이었다. 처음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이는 탑승 순간부터 지루해서 온갖 짜증을 부렸다. 활주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리겠다고 하여 모두를 당황하게 하였던 녀석이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1시간 이상 차를 타는 일은 아이에게 고통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참을성이 없다고 화를 내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끄럽다. 산책 중 사과를 하였더니 아이는 알 수 없는 미소만 흘린다. 그런 아이가 12시간가량의 비행기에 혼자 앉아서 올만큼 성장한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그간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었다. 봄이 오면 겨울 옷이나 이불들을 보관하기 위해 압축팩에 넣고 진공청소기로 공기를 빼낸다. 갑자기 아이의 넓은 등판에서 세월을 압축하는 진공청소기가 느껴졌다.


한강 하류는 바다처럼 넓어지는 곳이다. 바닷바람인지 강바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바람이 이중 삼중의 성긴 철조망을 통과하기 바빴다. 한강 하류에는 여전히 휴전선 못지않은 철조망들이 한국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픈 것들이 철조망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되돌아가야 할 지점까지 걷고 있었다. 1년 반 동안 가슴에 차곡차곡 저장해 두었던 이야기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실타래처럼 엉기고 말았다. 비행기 이야기와 런던에 두고 온 엄마와 고양이 이야기 그리고 독립 이야기가 전부였다. 오랜만의 부자간의 수다에도 시간과 수위조절이 필요하였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잠시 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반가운 아빠와의 재회도 졸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차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덕분에 아이 곁에서 낮잠을 즐겼다. 그동안 수면장애로 시달리던 사람이 낮잠을 잔다는 일은 상상도 못 했다. 밤에도 못 자는데 낮잠을 자고 있었다. 커다란 아이 곁에서 누워있는 일은 사치스러운 행복이었다. 아이가 코를 곤다. 아이의 코 고는 소리가 아빠를 재우는 자장가로 들린다. 세월이 주는 기쁨이었다. 세월은 나이만 강요하지는 않았다. 질병과 우울을 견디며 살다 보니 이렇게 훌륭한 크리스마스 선물도 준다. 세월은 어쩌면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가 아닐까 생각하며 낮잠이 들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길고 긴 낮잠이었다. 설렘이 행복으로 바뀌는 마법 같은 꿀잠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더 진하다.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없다. 저녁은 근사한 곳에 가서 소박한 만찬을 즐겨야겠다.






참고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삼성동 아지트리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5명 이상 되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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