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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26. 2019

여보, 시간 나면 우리 이혼할까? 1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네요!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네요! (프롤로그)



 

주위에 이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행복해 보이는 연예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혼해서 충격을 던져주는 일에도 이제 익숙해졌다. 지금까지 이혼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인 줄 알고 살아왔다. 높아가는 이혼율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그런데 그게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혼은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나만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혼 제의에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농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심이었다. 나는 심한 충격에 빠졌고 말기 암환자처럼 마음의 준비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의 요구에 따르기로 하였다. 당시 내가 받은 충격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의 기분이 어떨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가장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편과 아빠 노릇을 열심히 했다. 가정의 울타리를 지키는 일은 일단 경제적인 여유가 우선이었다.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틈으로 나간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열심히 살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이민을 가서 아이를 낳고 사업을 하며 정착해가는 과정은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다. 치밀하고 치열하게 쓴 시나리오 같은 개척의 시대를 해쳐 나왔다. 하루하루가 도전이었고 새로운 길이었다. 물론 그 과정을 아내도 같이 하였다. 아내는 나의 아내이기 이전에 사업 동료였고 친구였다. 하지만 그 지난한 개척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물질적인 보상은 얻었지만 정신적인 피폐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아내는 공황장애를 나는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였다. 이민으로 인한 고단함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국에 이민을 오지 않고 한국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정신적인 황폐화는 아내와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내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고 아내에게는 치료와 휴양이 필요하였다. 1년 일정으로 아들과 함께 떠난 한국에서의 생활은 3년을 채우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중학생이었던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3년이란 역 기러기 아빠의 생활은 나를 깊은 우울과 싸우게 하고 있었다. 가족은, 특히 부부는 떨어져 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결과가 준 선물이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부부간에 한번 깨진 신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봉합이 될 수 없었다. 내가 뱉어내는 단어들은 모두 변명처럼 왜곡되어 아내에게 전달될 뿐이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신뢰를 깨트릴만한 행동을 한 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인과응보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국가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다. 아내의 성격상 아내의 구형은 바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따르기로 하였다.

     



각자의 자유를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사람이라는 관계는 하나가 미워지면 백가지가 다 미워지는 법이다. 공황장애라는 무서운 병마와 싸우는 아내는 초인처럼 강인해져 있었다. 나 따위는 걸리적거리는 사람에 불과해질 정도로 아내는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혼자 살고 싶다고 하였다. 승려가 되어 살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내용들이 아내의 입을 통해 나올 줄은 몰랐다. 모두가 나로 인한 스트레스였고 나로 인한 정신의 피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선한 가장으로 죽어라 일만 한 나는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복귀를 하고 또 하였다. 바둑에서 패한 사람이 복귀를 해보는 것은 다음 대국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복귀를 하면 할수록 예상치 못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결국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혼 전의 다짐은 나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착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처럼 살았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까지 하게 되었다. 아무튼 우리는 현재 합의 이혼 중에 있다. 내가 한국에 있어도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내가 최종 서명만 하면 그걸로 우리는 자유인이 된다. 남이 된다는 것이 이처럼 간단하고 쉬울 줄은 몰랐다. 마치 결혼 전부터 각본에 의해 준비된 일처럼 느껴진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해체되는 동시에 아내는 건장한 아들을 얻었고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이 슬프고 괴롭게 한다. 아들에 대한 기대나 심적 의지가 컸던 모양이다. 이제 내년이면 아들도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다. 대학생이 된다. 돌이켜보면 아내가 오랜 시절을 참고 또 참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아들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모성애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도 남편으로 아내로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 이야기라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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