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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27. 2019

여보, 시간 나면 우리 이혼할까? 2

봉사활동과 추운 겨울의 빨래터


1. 추운 겨울의 빨래터


20년 전을 회상하려니 감회가 새롭다. 비록 색은 많이 바랬지만 청춘의 추억은 아름답고 사랑의 기쁨은 절절하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일 자체만으로도 벌써 설렘을 느낄 수 있다. 그 설렘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었다고는 하지만 20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설렘은 아직 나를 살아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은 더욱 선명해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만나면 대부분의 이야기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문을 열다가 잊어버리는 기억력들의 소유자지만 추억을 소환할 때는 그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고 심지어 현장감까지 더해져 바로 어제의 일처럼 묘사되곤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매가 오는 이유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친구들과의 만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복잡 미묘해진다. 저렇게 생생한 기억력을 가진 친구들인데, 저 친구들에게도 언젠가는 치매라는 무서운 질병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 인근의 봉사활동지에서였다.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고 아주 희미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사랑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위해 모인 우리 회원은 30여 명이었다. 일부는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일부는 청소를 하고 나머지는 우물가에서 이불 빨래를 하였다. 추운 겨울에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려서 이불을 밟아가며 빨았다. 손발은 물론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거기에 눈발까지 날리니 심리적인 추위는 더했다. 난로 하나 없이 그냥 눈을 맞으며 커다란 고무대야에 몇 명이 들어가서 이불빨래를 하는 그림은 젊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고흐나 고갱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분명 세기의 명작을 남겼을 것이다. 제목은 "눈 맞으며 이불 빠는 청춘들" 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날따라 유난히 추웠다. 그 추위는 맨발로 찬물에 들어가서 이불을 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흩날리는 눈발이 주는 심리적인 추위가 오히려 더 강했다. 다들 곱게 자란 청춘들인데 한겨울에 맨발로 눈을 맞으며 빨래를 하다니......,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그 추위는 빨래 빠는 회원들을 결속시켜주는 신비한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렇게 힘겨웠던 한 번의 이불 빨래는 두고두고 회자되었고 추억이 되었다. 그 추운 겨울에 기꺼이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부치며 이불을 빠는 회원 중 한 명이 바로 아내였다.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강렬한 생각도 봉사활동을 하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느꼈던 지고지순한 감정은 그렇게 사랑으로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빨래터에서의 첫 만남 이후 나는 그녀를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봉사지에 자주 나오지 않았다. 나는 수소문을 시작했지만 다른 봉사지에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개인적인 메일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답장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메일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메일을 보내는 일밖에 없었다.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심지어 이름조차 몰랐다.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메일 주소와 닉네임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답장이 왔다. 그 답장을 시작으로 우리의 간헐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지리산 근처의 대기업 임시 연수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잠깐 몇 시간 정도 얼굴을 보려고 왕복 8시간의 길을 매주 달려갔다. 덕분에 속도위반 딱지가 날라 오기 시작하였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카메라 과속 단속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였다. 사랑의 위대함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랑이 없던 삶과 사랑이 생겨난 삶의 차이는 넓고도 깊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랑이 진실하고 영원하리란 생각에는 아무런 의심이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짧은 몇 번의 만남은 강렬하였고 더 이상 서로를 탐색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만큼 완벽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비록 몇 번의 만남밖에는 없었지만 결혼을 추진하였다. 만남에서 결혼식까지는 몇 개월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봉사활동지의 빨래터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은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결혼 당시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내 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잘 해낼 자신도 있었지만 세월은 우릴 부부를 시도 때도 없이 흔들어대기 시작하였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흔들리고 말고는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티면 버틸수록 오히려 부러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빨래터에서 키 크고 날씬한 아가씨는 아이 엄마가 되면서 점점 날카로워져 갔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사랑의 기쁨이 사랑의 허무함이나 쓸쓸함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무하고 또 회의적인 날들이 시작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온 시간이 20여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2. 봉사활동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는 역사의 대 변혁기였다. 밀레니엄이 바뀌면서 종말론들이 터져 나왔고 금방이라도 세상이 뒤집힐 만큼 커다란 변화가 올 듯 언론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특히 각종 종교 단체에서의 세기말 현상을 이용한 세불리 기는 절정에 달하였다. 나도 새로운 천년이 오기 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당장 지구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어수선한 세기말 분위기에 편승한 나는 사과나무 한그루라도 심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모두가 아무 일 없으면 그때는 사과라는 과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시작한 일이 봉사활동 모임을 만들고 실제로 봉사를 시작하였다. 봉사에 봉자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도 거창한 일을 시작하고 만 것이다. 회원들이 간혹 왜 이런 모임을 만들어서 훌륭한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곤 하였다. "정부나 지자체 또는 종교단체에서 못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이라도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나의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논리 정연하고 말이 되는 소리다. 하지만 봉사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름 봉사 모임의 리더로서 카리스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없는 카리스마를 만드느라고 힘들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난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봉사활동 모임에서였다. 봉사활동은 서로에게 중요한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는 삶의 활력소였다. 살아야 할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였다. 봉사활동이란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어떠한 도움을 준다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나만을 위해서도 살아가는 일이 벅차고 힘이 드는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남을 도우려는 봉사자와 봉사단체가 무수히 많다. 인간답게 사는 일을 고민하다 보면 결국은 봉사와 마주치게 된다. 물론 인간답게 산다는 일이 봉사 하나만은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봉사라는 이야기다.

     


그 시절 봉사활동 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절정기였고 황금기였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로 국내에서 단순하고 쉬운 봉사활동에 매달렸다면 아내는 해외의 오지에서 장기 봉사활동을 해왔다. 내가 꿈꾸던 일을 아내는 이미 실행하였던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빠져든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점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는 의미는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도인의 경지에 접어든 것 이상의 가치 있는 삶이고 인생인 것이다. 그러한 회원이 우리 모임에도 있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매주 주말이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바쁜 와중에도 마음은 아내를 향해 가 있었다. 솔직히 봉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아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내를 만난 이후의 봉사는 형식적인 행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이중성과 이기적인 행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회원들에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모임을 이끌어가야 하는 리더의 역할은 막중하기 때문이었다. 그  리더의 역할을 내려놓을 준비를 시작한 것은 마음속에만 가지고 있던 이민이라는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민의 마지막 관문은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결혼할 배우자가 생기면서 나의 이민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시작되었다. 봉사활동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아직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크나큰 위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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