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확한 병명도 모르는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다. 다발성 경화증과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다발성 경화증도 아니다. 뭉뚱그려 전신 신경 무감각증 환자다. 신체의 어떤 부위만이 아니라 머리 두피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감각 이상이 온 것이다. 세수를 해도 얼굴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피부가 가려우면 피가 날 때까지 긁는다. 그래도 매주 한 권 책 쓰기를 만 1년째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야 할 시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책은 반드시 종이책이어야 하고, 책은 독자들에게 진한 울림을 주어야 하고, 책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서점에서만 팔려야 하고, 책은 출판사에서만 내야 하고, 책은 그래도 글줄깨나 읽은 사람들이 써야 한다는 등의 인식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어쩌면 지극히 자본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고정관념이자 편견일 것이다.
출판사 에디터의 눈에는 작가랍시고 써서 보낸 작자들의 원고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올 것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육두문자를 골고루 섞어서 쌍욕이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을 것이다. 이런 쓰레기들을 왜 자꾸 출판사로 보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가 쓰레기장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의 눈에는 팔릴만한 글들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할 사람도 생각도 없다. 그들은 직업으로서 글을 대하고 책을 만들어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농부의 눈에 비친 사과나 배의 상품성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서 흠집이 생기면 팔리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 사과나 배가 많은 해에는 한숨이 절로 난다. 까치나 까마귀들은 귀신같이 당도가 높은 사과나 배만 쪼아 먹는다. 하지만 일단 흠집이 생기면 당도나 맛은 다음 문제가 되고 만다. 농부의 눈에는 팔릴 사과나 배만 눈에 들어오고 실제로 그것들만 내다 판다. 흠집이 있는 과일을 사 먹으려는 소비자는 없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머지는 거름으로 버리거나 즙으로 만들어 처분할 것이다.
서울대학교 병원 전경
오늘은 서울대병원에서 하루 종일 나의 신경세포에 대한 정밀검사가 있는 날이다. 삼성중앙병원과 고대 안암병원 등에서 이미 동일한 검사가 있었지만 아직 병명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내가 느낀 의사 선생님들의 특징은 절대 모른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안다고도 하지 않는다.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스트레스가 원인일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의사들도 있었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말이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성인병의 주범인 과음이나 과식도 스트레스로부터 시작된다. 제발 하나마나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환자들의 눈에 의사들은 절대적인 존재다. 환자들은 죽고 싶지 않아 몸부림친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애가 탄다. 나라고 에외가 아니다. 아직 죽고싶지 않다. 좀 더 살아보고 싶다.
아무튼, 마지막 희망으로 찾아온 서울대병원이다. 어떻게든 나의 운명이 결정 났으면 좋겠다. 3개월이나 기다린 끝에 12월에 초진이 이루어졌고 다시 2개월 만에 정밀검사를 하게 되었다. 병원 시스템이 느리기로 유명한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영국이다. 나는 영국만 느려 터진 줄 알았는데 한국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였다. 영국이야 병원비라도 공짜지만 한국은 내 돈 내고 진료를 받는데도 5개월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몇 천만 원의 거금을 들여가며 1년 이상 한국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병원비 전액 무료의 혜택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온 이유는 하나였다. 한국은 그나마 내가 병원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도 유명하다는 병원들은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 찾아온 이 병원에는 상당한 지인들이 근무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치기가 불가능했다. 내가 원하지 않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나의 생명만큼 소중하고 급박하니깐! 희귀 난치성 질환이긴 해도 당장 죽을병도 아닌데 호들갑을 떨 이유도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정확한 병명이라도 알고 싶었다.
희귀 난치성 질환은 병명을 알아도 치료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나와 같은 신경세포의 이상으로 인한 무감각증 환자들은 유사한 병이 수백에서 천여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희귀 난치성 질환을 연구하는 의사나 학자들도 많지 않다고 한다. 우선 암환자들처럼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위암이나 간암 및 유방암 등의 환자들은 세계적으로 수백만이지만 희귀 난치성 질환의 경우, 환자 수는 극소수다. 그래서 희귀 난치성 질환이라고 부른다. 성소수자들처럼 병 소수자들이 바로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나 같은 환자들이다. 그 소수를 위해 수백억 이상의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노벨 의학상이나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신약개발이나 치료법이 요원해 보이는 이유다. 이국종 교수 사태를 보면서 더욱 절망한다. 한국의 병원들은 비영리법인이지만 일반 기업보다 더 영리를 추구한다. 돈이 되지 않으면 응급 환자들을 뺑뺑이 돌리다 사망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한국 의료계의 민낯이다. 슈바이처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 의료계에 종사하는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만은 지켜주기 바란다. 사람의 생명을 자본에 의해 살리고 죽이는 뉴스들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신경계 검사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잡혀 있었다. 알람은 아침 6시 반에 울렸다. 불면증 환자에게도 알람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에 쑥스러워지는 아침이다. 샤워를 하고 목발을 짚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을 나서니 7시다.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어둠은 뒷걸음질 치며 빛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였다.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영국에서 아침 6시 반에 출근하던 기억이 새롭다. 백화점 지하의 슈퍼마켓 오픈 시간에 맞추려면 아침은 매일 전쟁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초밥 진열대를 채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하고도 몇 달이 흘러버렸다.
예상대로 올림픽대로와 자유로는 어마 무시하게 막혔다. 그놈의 목발만 아니었더라면, 아니 코로나만 아니었더라면 지하철을 이용했을 것이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강물이 얼었다. 우측 창문을 내리고 세심히 살펴본다. 너무 신기해서다. 바다 같은 한강이 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강 주변은 꽁꽁 얼었는데 중앙부는 아슬아슬하게 얼었다. 썰매를 타고 강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향하다 어느 순간 아슬아슬함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순간, 차 안으로 불어 닥치는 강바람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채 1분도 안 되는 짧은 일탈이었다. 일탈은 언제나 달콤하게 시작해서 아슬아슬하게 끝이 난다.
한강변의 일출
그러고 보니 어제가 입춘이었다. 어제는 첫눈도 내렸다. 입춘도 지났는데 영하 11도라니! 이번에도 한국의 봄은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으려나 보다. 벌써 한국에서 두 번째 봄을 맞게 생겼다. 다리를 건너 자유로에 진입하자 붉은 기운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서울에서 일출을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일출을 보기나 했는지도 의문이다. 그 당시에도 일산에서 서울로의 출근은 항상 지하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맞이한 서울의 일출은 동해안이나 성산포 못지않다. 당시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는 예쁜 사각형의 산으로 변해 있었다. 어색한 사각형의 동산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딱 오늘 분량만큼의 태양은 꽃이 피듯 화려하게 떠오른다. 대지를 녹여주는 저 불덩이가 가슴 안으로 울컥 스며든다. 알 수 없는 슬픈 희열이 느껴진다.
그 사이 10살이 넘은 털털거리는 차는 내부순환로로 접어들었다. 흐름이 부드럽다. 내친김에 홍제가 아닌 정릉으로 나와서 다시 북악 스카이웨이를 탔다. 간밤에 내린 눈 탓인지 차가 거의 없었다. 이 길도 얼마 만에 타보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25년은 넘은 듯하다. 기억나지 않는 오르막들과 내리막에 이어 90도 이상 휘감아 치는 곡선 위에는 염화칼슘이 두툼하게 뿌려져 있다. 잔뜩 긴장해서인지 팔에는 힘이 들어가서 핸들링이 쉽지 않았다. 런던에서 택시운전까지 한 베테랑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하늘길 운전이 무섭다. 브레이크도 함부로 밟지 못하였다. 혹시라도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애꿎은 내비만 탓한다. 왜 생뚱맞게 이길로 안내하는지 모르겠다. 눈이 내려 차가 막히지 않는 이유까지 계산에 실패한 내비다. 그래도 용서하기로 했다. 밖은 마이너스 11도인데 등줄기에서 송골송골한 땀이 한 방울 맺힌다. 그 한 방울의 땀은 영롱한 이슬처럼 척추의 등골뼈 사이를 타고 내리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어딘가에서 흡수되고 만 것이다.
서울대병원 발열검사
정확히 2시간 만에 서울대 병원에 도착하였다. 자주 오다 보니 이제 주차장부터 대강의 그림들이 그려진다. 주차는 항상 1 주차장에 한다. 2 주차장이나 다른 주차장이 빠른데도 오늘도 1 주차장에 주차하였다. 이유는 익숙함이다. 불안이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익숙한 경험치뿐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안다. 지상으로 나와서도 목발을 짚고 제법 걸어서야 본관에 도착하였다. 병원 정문부터 많은 직원들이 나와서 발열검사를 한다고 난리가 아니다. 이틀 동안 지독한 감기 때문에 앓아누워 있었다. 고열에 시달려와서 내심 불안했다. 무릎 수술 후 그렇지 않아도 면역력이 떨어져 더욱 불안했다. 오늘은 고열은 아니지만 여전히 미열이 있다. 상당히 불안하다. 병원에 들어서며 이처럼 긴장해보기는 처음이다. 혹시라도 발열검사에서 적발되면 끝장이다. 바로 어디론가 끌려가서 음압 병동에 격리라는 이름으로 갇힐 것이다. 도축된 소나 돼지처럼 번호표가 붙고 나의 동선을 추적할 것이다. 그리고 전국은 또 한 차례 호들갑을 떨 것이다. 속보로 00 몇 번 환자 확진 판정을 전국에 알릴 것이다. 사람들은 한층 더 불안에 떨 것이다. 나는 발열검사를 받는 그 짧은 사이에 그동안 나의 동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까뮈의 페스트에 생생하게 묘사된 바이러스의 공포는 현실이 되어가는 중이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현실을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카뮈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진표와 면회금지 싸인
다행히 열은 정상치를 넘어서지 않아서 문진표를 받고 입장이 허용되었다. 무슨 상이라도 받은 양 안도의 한숨이 답답한 마스크 밖으로 흘러 나간다. 4층 신경과 검사실에 도착할 때까지 사람이 거의 없다. 평소 같으면 환자들로 북적대는 병원은 오간데 없다. 메르스 사태 당시 삼성병원의 재앙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짧았나 보다. 환자가 없는 병원에서 문득 공포를 느낀다.
서울대병원 본관 5층 신경과
이곳은 가장 안전한 곳일까? 아니면 가장 위험한 곳일까? 이 얇디얇은 마스크 한 장이 과연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줄 수 있을까! 쿼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4층 신경과 검사실의 대기석에는 노인 몇 분이 거리를 유지한 채 앉아 있었다. 갑자기 어떤 할아버지가 기침을 하신다. 예사로운 기침이 아니었다. 기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할아버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안한 할아버지도 잠시 자리를 뜬다. 화장실에라도 다녀오실 모양이다. 순간, 절망이 현실이 되어갈지 현실이 절망이 되어갈지 모르는 불안이 다시 엄습한다.
김포 한강변의 단골식당 및 카뮈의 페스트 표지
이 사태가 지속된다면 자영업자들부터 쓰러질 것이다. 코로나가 아닌 공포에 의해서 말이다. 식당이나 카페들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특히, 내가 매일 다니다시피 하는 동네의 한 식당은 사정이 제법 심각하였다. 사장님의 표정에서 시국의 어둠과 불안히 진하게 배어있었다. 한강 전망이 일품인 그 식당은 다슬기 해장국과 청국장을 파는 곳으로 항상 줄을 서야 하는 곳이었다. 갈 때마다 직원 아줌마들은 서너 분이 아예 앉아서 쉬고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는 그녀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불편할까! 직원들이 마스크를 안 썼다고 들어오다가 다시 나가는 손님들도 있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면 썼다고 호들갑인 손님들도 있다는 말에 그녀들의 고충을 이해할 것 같았다. 직원들까지 마스크를 쓴 식당에서 불안해서 밥이나 먹겠느냐는 말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런 수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손님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라고 했다. 사태가 길어지면 실업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희망을 이제라도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것은 공포이고 밥 벌어먹고 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에서의 이탈이다. 오늘도 몇 달째 밀린 월세와 고지서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지천이다. 한강 다리 난간에 올라가고 싶은 사람들의 긴박한 문제들은 바이러스의 소동에 묻히고 말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불의나 부조리에 끄떡도 하지 않던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일은 형체도 안면도 모르는 바이러스의 몫이었다. 한강 다리 난간에 올라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마스크를 던져주며 힘내라는 영혼 없는 응원뿐이다.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정말 힘을 낼 수 있다는 희망이지 않을까!
참고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삼성동 아지트리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5명 이상 되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