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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Feb 14. 2020

스코틀랜드산 명이의 끈질긴 삶!

"죄송해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보호자는 밖에 계시나요?"

스페인 마드리드의 가로수는 레몬 나무였다!


봄이 오고 있다. 영국에 지천인 명이(wildgarlic)는 탐스럽고 아름답다. 길고 가녀린 잎으로 자라는 영국의 명이 순들이 보고 싶다. 지금쯤이면 런던 집 정원 담벼락 아래에는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에서 공수해온 명이들이 순을 밀어 올리고 있을 것이다. 정원에 심어둔 명이의 튼실해진 뿌리는 매년 겨울을 견디며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벌써 5년째 봄에는 순을 내밀고 여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씨앗을 떨구는 지난한 일을 묵묵히 반복하고 있다. 명이에게는 번뇌도 절망도 없다. 그래서 더욱 두고 온 명이들이 그립다. 매년 죽고 태어나지만 슬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대지에 굳건하게 내린 뿌리는 잎이 없는 겨울을 견딘다. 나도 그런 명이들을 닮고 싶다. 살고 죽는 일에 연연하지 않고 싶다. 미래들이 토막 나기 시작하면서 내일을 알 수 없지만 써야 할 글과 책들이 너무 많다. 못다 읽은 책들은 도 어찌한단 말인가! 그래서 삶에 연연하기로 했다. 그리고 굳건하게 뿌리를 대지에 묻고 있는 명이처럼 살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신경과 성정준 교수 진료실


”차라리 암이라면 치료라도 가능한데! 죄송해요.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보호자는 밖에 계시나요?” 순간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나의 삶도 일그러진다. 그 와중에도 하얀 목련과 노란 개나리가 떠올랐다. 영국집의 정원에서 움트고 있을 스코틀랜드산 명이나물의 순들이 그나마 나를 붙들어주었다. 나는 몇 번이나 더 아름다운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인생의 봄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연계의 봄의 횟수가 갑자기 중요해졌다. 유독 좋아하는 봄의 코앞에서 나는 그렇게 주저앉았다. “혼자 와서 밖에는 보호자가 없는데요! “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였다. 다만, 목젖 아래 어느 지점에서 울컥했던 것이 희망이 아니었음이 슬퍼질 뿐이었다. 벌써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그래서 병원 유목민처럼 떠돌았던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로 전환되는 시점을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머리가 애써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대문화방 줄리 선배님이 올린 그림



2월 두 번째 수요일이었다. 서울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우수에 젖은 채 반쯤은 넋이 나가 있었다. 갑자기 비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하필 병원에 결과 보러 가는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것일까! 막히는 도로 위에서 오직 비만을 생각하였다. 비와 관련된 추억들을 생각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예약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다. 대학로에 있는 대학병원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목발에 의지한 채 본관 지하에 있는 신경과로 향한다.      


진료 접수를 하고 20여분을 기다렸다. 내 앞에 두 사람의 환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쩌면 나의 뒤에 있어야 할 환자들일 것이다. 만일 내가 늦지 않았다면.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다시 문진 출입 확인서를 요구한다. 주머니에서 꺼내 들어 보였다. 지난번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건조한 공기가 칼칼하다.   

   

의사 선생님을 마주 보고 앉았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마른침을 삼키다가 목젖 아래쪽 어딘가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온다. 양손바닥을 연신 바지에 문지른다. 정말 땀이 배어 나와서인지 습관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온몸의 세포들은 바짝 엎드려서 고개를 숙인 채 귀만 쫑긋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긴장해본 적은 처음이다.      


서로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그 흔한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이 목에 걸려서 나오다가 말았다. 의사 선생님은 1주일 전의 정밀 검사들을 드려다 보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콧등에 걸쳐진 둥그스름한 안경알이 반짝인다. 형광등 불빛이 안경알 유리에 튕겨져 나와서 어지럽다. 왼쪽으로 단정하게 길이 난 가르마를 중심으로 흰머리들 역시 형광등 불빛에 어지럽기는 마찬가지다. 흰머리 사이로 검은 머리가 나온 것인지, 아니면 검은 머리 사이에서 흰머리가 나온 것인지 모를 정도로 흰머리의 잔상은 강렬하였다. 의사 선생님의 애꿎은 흰머리만 새고 있었다. 아무리 잘 봐주려 노력해도 흰머리가 더 많았다.      


그 짧은 시간에 생각은 멈추었다. 나의 시선은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들을 떨치려 애꿎은 의사 선생님의 신상을 털기 시작하였다. 의사 선생님의 안경은 사각형의 작은 얼굴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얼굴 윤곽은 제법 짜임새가 있었다. 이 정도면 잘생긴 편이었다. 흰머리와 검은 머리의 비율에 신경이 쓰인 이유는 그의 동안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소년이 가발을 쓴 것처럼 그의 피부는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무지 나이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보다 많을지도 아니면 적을지도 모르는 그의 나이가 궁금해진다. 하마터면 물어볼 뻔했다.    

  

그 순간, 선생님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고양이가 허리를 최대한 늘어뜨리고 기지개를 켜듯이 서서히 움직이는 입술 모양에서 문득 공포가 밀려왔다.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에도 병명도 모르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다른 대형 병원에서처럼, 병명을 밝혀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그냥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서서 나오고 싶었다. 그토록 궁금했던 정확한 나의 병명에 대한 궁금증은 스멀스멀 사라지고 있었다. 왜 그 순간에 갑자기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밀려왔는지 모르겠다.      



고대 문화방에 줄리 선배님이 올리신 그림



”다발성 말초 신경계 증후군”      


나만큼은 아니지만 의사 선생님도 당황하신 눈치다. “다발성 경화증”이라고 예상했던 것이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이다. 타 병원들에서는 아니라고 우기던 병이다. 이러한 희귀병에 걸릴 확률은 몇십만 분의 일이라고 한다. 다발성 말초 신경계 증후군은 일종의 희귀 난치성 병이라고 한다. 다시 정밀 검사를 해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는 말은 무겁고 버거웠다. 원인은 천 가지도 넘는데 현대 의학으로 밝혀진 것은 기껏해야 30% 정도라고 한다. 하버드 의대 교수들을 찾아가도 방법이 없다고 한다. 밝혀진 원인도 치료법은 없다고 하였다. 경과가 나빠지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것이 그나마 최선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나를 더욱 절망케 하였다. “차라리 암에 걸리면 치료라도 가능한데! 요즘 암들은 말기만 아니면 완치도 가능해요!”     


이미 예상했던 터라 나의 하늘이 노래지지도, 무너져 내리지도 않았다. 덤덤해지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사형수들의 사형은 언도받았을 때의 마음이 이랬을까! 갑자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한 때 삶의 끈을 놓지 못해 그토록 애가 타던 시간들에게 미안해진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나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머니 장례식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한방을 떨어진다. 남자는 늘 강해야 한다고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당시의 내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왜 남자들은 울면 안 된다고 아이에게 말했을까! 남자들도 사람이고 남자들도 감정 덩어리들이다.    


영국 런던 집 정원의 담벼락에 있는 스코틀랜드산 명이

 

밤새 뒤척이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맞이한 아침에는 그날 아침에는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동이 트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쨌든 일생에 한 번은 맞이해야만 하는 하루가 지나갔다. 비를 대하는 낯선 내가 낯설었고 의사 선생님의 흰머리들이 유독 낯설게 보였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한강 다리 위에도, 다리 아래의 흐르는 강물 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묵직한 내 마음도 끈적이는 빗물도 강물에 흘러가고 있었다.   






참고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삼성동 아지트리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5명 이상 되었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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