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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입원이라니..

"그 남자의 살림살이" #2. 희귀 난치병 환자의 병실에서 글쓰기

by 런던남자
이 와중에 오늘 입원을 하였다.


지금 이 순간 병실은 고요하다. 모두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온 나라가 전장이고 격전지가 따로 없는 현실이 비현실처럼 보일뿐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전쟁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할머니나 어머니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었다. 소설의 허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전쟁을 체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전쟁 훈련에는 여러 번 참여를 해봤다. 나는 지금 공교롭게도 남들이 다 꺼려하는 병원에 있다. 통원도 아니고 입원 중이다. 덕분에 코로나 19의 최전방 격인 병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 경황없는 와중에 다시 입원을 한 것이다.


어린 시절 시골집의 구렁이와 제비 새끼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24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평소의 몇 배나 되는 긴 하루였다. 그 하루가 사람과 공간 그리고 생각들을 관통하고 있다. 커다란 구렁이가 담을 넘듯 하루가 조용히 미끄러져 내린다. 그리고 긴 꼬리를 감춘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는 구렁이가 살았다. 그때 시골집에 살던 구렁이는 영물이라고 잡지 않았다. 시골집에는 구렁이가 살 수 있는 돌로 쌓은 담벼락과 초가지붕들이 있었다. 구렁이는 이 집 저 집을 넘나들며 온갖 인간에게 해로운 쥐와 해충을 잡아먹고살았을 것이다. 물론 해충이 아닌 동물도 먹잇감에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구렁이는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순식간에 제비집을 털 정도의 민첩성을 겸비한 구렁이는 제비 입장에서는 공포 중의 공포였을 것이다. 그래도 제비는 해마다 같은 자리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구렁이의 공포 속에서도 부화한 새끼들의 육아 전쟁을 치르던 제비가 떠오르는 하루다. 제비 새끼들에게는 죽음 앞에서만 딱 한 번 맞닥뜨릴 수 있는 실체가 바로 구렁이였을 것이다. 구렁이가 사냥에 실패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사소하고 평범한 오늘을 기록하는 이유


피곤을 무릅쓰고 오늘의 특별한 느낌들을 기록하는 이유는 10년이나 20년 후에 단지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오늘의 다중 불안과 불확실성을 국민들이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 일을 많은 작가들이나 블로거들이 이미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만의 기록은 여전히 필요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지치고 힘든 예민한 시국이다. 앞으로도 이런 사태들은 시차를 두고 반복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지금 전장의 한 복판에 있다. 솔직히 두렵고 공포스럽다. 운명에 맡긴 채 하루하루를 버텨낼 것이다. 조만간 종식될 거라는 희망의 끈이 유일한 나의 등대일 뿐이다. 그나마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는 글쓰기뿐이다. 혼자만의 고립된 시간들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외롭고 쓸쓸하다.


조작된 공포도 엄연한 공포였고 두려웠다.


아주 오래전이다. 강원도의 척박함과 황량함에 청춘을 내주던 시절이 떠올랐다. 00시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투준비 태세가 발령되자마자 완전군장을 꾸리고 장갑차 옆에 도열하던 풍경이 아직 선명하다. 당시 개인화기인 M16엔 대검까지 장착하고 전투식량까지 지급받으며 장갑차가 있는 참호로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방독면까지 허리에 차고 나면 도저히 뛸 수 없는 무게지만 이를 악물고 뛰어야만 했다. 물론 실전을 가장한 모의 훈련이지만 1년에 한두 번 미군과 함께하는 훈련은 실전을 방불케 하고도 남았다. 적어도 분위기만은 그랬다. 그때도 "만약 이 상황이 실전이라면 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수도 없이 생각하였다. 목숨을 담보로 가상현실처럼 조작된 공포는 젊은 혈기에도 두려웠다. 전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두려웠다.


실체가 보이지 않기는 바이러스나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차 통증이 심해지고 있다. 오늘 혜화동의 S 병원에서 의무 기록 사본을 발급받아서 분당의 모 병원에 입원하였다. 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병원에서도 정작 무서운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그 바이러스로 무장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었다. 가끔 자지러지는 기침을 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가 공포에 떠는 모습이 더 공포스러웠다. 오늘 입원한 병원 병실의 복도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10여 분 가까이 기침을 하는 바람에 병동이 발칵 뒤집혔다. 간호사들이 달려오고 할머니를 격리시키려 한다. 할머니는 당황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으신다. 할머니가 천식 환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입원한 나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치지 않는 할머니의 기침소리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괴기스러웠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전사하는 것 아냐!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단순한 공포가 아닌 생과 사를 가를 수도 있는 공포 앞에 다들 바싹 엎드린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실체가 보이지 않기는 바이러스나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몇몇 사람들의 문제였다면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민낯과 바이러스 덩어리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잊혀 갔는지 모른다. 심지어 그 생때같은 어린 죽음들이 비하되고 폄하되기까지 하였다. 여기저기서 터진 참사들의 희생양 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국민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억울한 죽음들은 몇몇 사람들만이 감내해야 하는 공포였고 슬픔이었다. 일부에서는 공감 능력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지만 머나먼 남의 일뿐이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넘어 공포스럽고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불청객일 뿐이다. 누구나가 맞이해야 할 필연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결코 들이닥치지 않을 것처럼 삶을 살아간다. 타인을 배려하는 일은 고사하고 등에 빨대를 꼽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안하무인에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 그게 다 자신의 능력이고 심지어 과시의 대상이다.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부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찾는 일은 애당초 의미조차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 지도층이나 일부 상류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이러스처럼 온 국민에게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마르크스가 예상했던 자본주의의 민낯은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바이러스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당연한 거짓이 희귀한 진실을 이해할 수 없는 굴절돼버린 세상!


카뮈가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를 통해서 하려고 했던 말은 "정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랍인을 총으로 쏴서 죽인 이유가 "그날 햇빛이 너무 강렬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뫼르소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는 양형을 받기 위해 충분히 둘러댈 수도, 그럴싸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가 느낀 당시의 감정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해 버렸다. 진실을 말한 대가는 어이없게도 사형선고였다. 사형을 언도한 이유는 뉘우치지 못하는 공감능력의 부재였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았고 심지어 여자 친구와 관계를 즐기기까지 하였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뫼르소를 이해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발성 말초 신경병증"이라는 희귀 난치병을 않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며칠 후에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타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지만 바이러스가 요청해오면 내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면역력 교란으로 신경세포들끼리 치고받고 하는 난타전이 지금 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기록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309호 병실의 여기저기서는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가끔 기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렵지만 그래도 한가하고 평화롭다. 어쩌면 모두 가련한 목숨 들일 것이다. 단 한 번 뿐이고 하나뿐인 목숨들을 지키려 오늘도 필사적으로 먹고 마시고 배설을 하고 이렇게 코를 골고 잠을 잔다. 그리고 각자의 병마와 싸우는 중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바이러스는 공공의 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망각한 채 살고 있는 인간의 오만과 위선을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바이러스 앞에서는 양극화나 빈부갈등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이러스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노약자나 어린이 그리고 나와 같은 환자들은 죽음의 최전방에 내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김포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분당으로 캐리어를 끌고 다니다 보면 등줄기에선 땀이 흐른다. 입원하려고 가는 사람이 승용차를 가져갈 수도 없다. 지난달에 수술한 왼쪽 무릎에 신경을 써가며 작은 기내용 캐리어 하나 끌고 다니는데도 서울의 대중교통은 힘이 든다. 장애인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는 분들의 일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하루다.


군 복무 중에 맞이했던 전투준비 태세 발령에도 이처럼 진땀을 흘려본 적은 없었다. 인간들의 전쟁은 실체가 있고 피아를 구분할 수 있지만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피아 식별이 불가능하다. 어느 특정 종교단체나 진원지인 중국을 탓하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내 몸 안의 신경세포들이 서로 공격을 하며 전쟁을 치르듯이 지금 세상은 피아식별조차 분간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다. 나만 살겠다고 진실을 숨기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세상에 일격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분명 인류의 적이고 속히 퇴치해야 하는 암적인 존재다. 공교롭게도 바이러스가 이 사회의 환부들을 도려내고 있다. 결코 혼자 죽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진실 하나면 충분하다!


이제라도 거짓의 가면들을 벗어던지는 용기들이 필요하다. 죽음 앞에서마저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의 힘이다. 나만의 호의호식과 나만의 천국을 위해서라면 진실을 아무 때나 거짓과 엿 바꿔 먹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라도 줄어들기를 바란다. 물론 나부터 좀 더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동안 등한시했던 사회 문제를 이제는 국민들이 들여다볼 시기가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다. 이제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라는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대함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 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진실 하나로 충분하다.






참고로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는 선정릉역 모두의 캠퍼스에서 "나는 매주 한 권 책 쓴다" 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만에 책을 쓰고 매월 또는 매주 책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처럼 매주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이 15명 이상 되었다. 매월은 100여 명 정도다. 앞으로도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강의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https://www.onoffmix.com/)에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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