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그 남자의 살림살이" #4. 조영제를 사용한 뇌 MRI를 촬영하며..

by 런던남자


무미건조한 일상과 살아 숨 쉬는 일상. 그 경계는 결국 "사랑"이었다.


병실에서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고 있다. 4대 희극과 4대 비극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 대학시절에 읽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였고 불혹을 지나 지천명이라는 반갑지 않은 훈장까지 받았다. 마음만 청춘인 삶을 살면서 신체 여러 기관에서 파트(부품)를 교체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차량의 경우, 연식이 너무 오래되어 교체할 파트가 없다면 폐차 수순을 밟아야 한다. 폐차를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다. 수리비용이 과도한 경우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빈티지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돈을 들여 중고차를 수리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폐차 결정이 내려질지도 모르는 중요한 날이 밝았다. 병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겨울비인지 봄비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다. 길고 낮은 창문을 열어 손을 뻗어본다. 손바닥과 손 등을 번갈아서 뒤집어본다. 비의 촉감이 시원하다. 무채색의 거리와 복잡한 간판들을 포함한 거리 풍경들이 길고 낮은 창틀만큼만 펼쳐진다. 다른 풍경을 보려면 내가 창틀의 각도와 구도를 바꾸어주어야 한다.


오늘은 입원 3일째 되는 날이다. 조영제를 사용한 뇌 MRI를 촬영을 위해 지난밤부터 금식을 했다. 뇌 MRI는 지난해 여름에 이어 두 번째다. 심장을 포함하여 다른 파트는 수리가 가능하거나 심지어 교체할 수도 있지만 뇌는 아직은 아니다. 만일 SF 영화에서처럼 뇌를 교체한다면 그건 더 이상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몸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둥지를 틀고 사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뇌는 수리해서 사용해야만 하는 영역이다. 물론 수리도 쉽지 않다. 자동차나 비행기의 엔진은 인간의 뇌에 비하면 간단한 장난감 수준일지도 모른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된 뇌 MRI 촬영 도중 잠시 잠이 들었다. 헤드폰을 통해 전달되는 파동의 진폭이 다른 두 가지 음이 들렸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그 웅장하면서도 기하학적인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런 소리가 나게 하는 이유가 있지만 물어볼 수도 찾아볼 수도 없다. 바싹 긴장한 채로 부동자세를 취한다. 마치 시체놀이를 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자세다. 움직이면 사진이 흔들리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게 머리와 목을 고정시킨다. 전신에 힘을 빼라는 주문과 함께 뇌 MRI 촬영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 동안 과연 어떤 생각이 나를 지배할까? 사실, 한 시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생각을 조작해서라도 긍정이나 행복과 연관된 단어들을 떠올리려 애를 써본다. 잠깐 잠이 든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현제 나의 심신 상태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고 있었다니! 그랬다. 나는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지금 혼자 살아가는 일도, 알 수 없는 병마의 원인을 찾아 나서는 일도, 남은 생을 탐닉하려는 것도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다. 무미건조한 일상과 살아 숨 쉬는 일상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뇌 MRI를 촬영하는 그 시간에 그 경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경계는 결국 "사랑"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사랑을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사랑 없이도 일상은 반복되고 내일의 태양은 어김없이 뜬다.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병실에서는 치료자의 손과 환자의 피부의 접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때마다 치료자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동일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감정이 있었다. 그 감정은 순간의 터치이기는 하지만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사랑은 이처럼 단순한 터치에서부터 시작되는 접촉일지도 모른다. 격정을 쏟아내는 혼신의 섹스보다 작고 순간적인 스킨십 하나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도 그 터치들조차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질 만큼 나는 사랑에 목이 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가 황금인 것은 아니다.


"베니스의 상인, 제7장 벨몬트, 포셔의 집 방"에서 모로코 왕이 포셔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세 개의 상자를 선택하는 시험을 치른다. 상자는 금상자와 은상자 그리고 납상자 세 가지다. 당신이라면 과연 어떤 상자를 택할 것인가? 이 세 개의 상자 중 하나에 아름다운 포셔의 초상화가 들어있다. 포셔를 아내로 맞이할 확률은 정확하게 33.33..% 이다. 각 상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금상자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만인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은상자에는 "나를 선택하는 자는 신분에 알맞은 것을 얻으리라."

납상자에는 " 나를 선택하는 자는 전 재산을 내놓고 모험을 해야 한다."


모로코 왕은 고심 끝에 황금상자를 선택한다. 그런데, 이 황금상자에는 기대했던 포셔의 초상화 대신 해골바가지가 들어있다. 해골바가지의 텅 빈 눈구멍에는 다음과 같은 두루마리가 들어있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가 황금인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을 그대는 들었을 것이다.

겉모습만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팔았다.

황금 칠한 무덤 속에는 구더기뿐.

그대가 용감한 것처럼 슬기로웠다면.

사지는 싱싱한데 능숙한 판단력이 있었더라면.

두루마리에 이런 대답은 없었을 것이다.

잘 가거라. 그대의 청혼은 싸늘하게 식었도다.


모로코 왕은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난다.


"꿈은 사라졌다. 그렇다.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잘 가거라 사랑의 열정 이어. 오너라. 싸늘한 현실이여. 안녕히. 포셔 작별이오. 가슴이 아파 긴 인사는 못하겠소. 폐자는 물러갑니다."


내가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잊었던 사랑을 하고 싶다.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것도 아니면 자연을 탐닉하거나 글쓰기에 빠져도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뭐든 좋다. 다음 주말에는 아마도 남도의 월출산 산장에서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따라서 병의 치료도 그 시작되는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을 치료하지 않고 나의 병들을 치료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다. 쓰고 있는 이 순간만이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살아 있음을 손끝의 감각으로 느낀다. 자판을 두드리는 힘이 남아 있는 한, 이 즐거움을 이어갈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서울 선정릉 [모두의 캠퍼스] 강의 신청하기 / 월출산 국립공원 카페 [기억] 강의 신청하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