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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n 08. 2020

할머니의 사랑과 해물대파라면

제15화. 할머니의 사랑과 음식

                                                      

 수많은 여자를 추구하는 남자는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한쪽은 모든 여자에게 자기 고유의 꿈, 여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찾는다. 다른 쪽은 객관적인 여성 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첫 번째의 부류의 남자들은 멜로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낭만적 집착의 사랑을 보인다. 이들이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좌절하고 방황한다. 그 이상은 우리가 결코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엘도라도와 같은 이상향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낭만적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파국이 올 줄 알면서도 항상 사랑에 목말라하고 사랑을 찾아 나선다.

 두 번째 부류의 남자들은 여인들에게는 감동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일회성 바람둥이 형 집착을 말한다. 주인공 토마시가 그랬던 것처럼 기이하고 변태적인 사랑을 추구한다. 주인공 토마시는 외과의사 전문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리창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오히려 이러한 기회를 훨씬 많이 보장받게 된다. 유리창을 닦으러 나가는 집들에는 남편들은 출근해서 부인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의 특징은 관습적인 여성미를 멀리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금방 실증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인공 토마시처럼 일부다처재의 삶을 추구해가며 많은 여자들을 탐닉한다. 호색한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한다.    
   

  

지난달 전주에서 조카의 결혼식 모습, 녀석은 좋아서 결혼식 내내 싱글벙글이다.


 얼마 전 조카가 멋진(?) 결혼식을 올렸다. 많은 하객들은 그동안의 지루한 격리생활을 뿌리치고 결혼식장에 나타났다. 누군가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는 일은 묘한 설렘을 주며 즐거운 일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객 모두가 그렇듯이, 신부나 신랑처럼은 아니지만, 식장의 조명에 부끄럽거나 움추러들까봐 최대치의 아름답거나 멋짐을 발산하려 노력한다. 그 누군가가 혈육일 때 느끼는 감정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둘째 형은 결혼을 했고 그 신혼집에서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신혼집은 전주의 변두리 외곽의 배 과수원 바로 옆에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곳이 전주 시내의 중심이 되었지만. 월세 집은 방이 두 칸이었다. 붙어있었지만 분리된 것처럼 보였고 분리된 것처럼 보였지만 붙어있었다. 주방과 욕실 또한 방과 분리된 한옥도 아니고 양옥도 아닌 그런 집이었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사실은 같은 지붕을 쓴다는 사실이었다. 집 마당에서부터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 끝집이 고모네 집이었다. 마당 옆에는 해마다 삼나무가 자랐다. 삼나무는 키가 3미터 이상 크게 자란다. 대마초의 재료가 되는 삼나무는 풀인지 나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고부 갈등이 정점일 무렵, 아버지는 신의 한 수를 찾으셨고 마침내 그 수를 두셨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3년만이라도 떨어트려 놓는 일이었다. 내가 전주로 유학을 떠나면서 산골 생활은 마감이 되었다. 시골 친구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 되면서 자취방을 구했고 자취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부모님의 특혜(?)를 받았다. 바로 할머니를 파견 근무시켜서 고등학생이 된 나를 공부에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아버지의 이 결정에 가장 좋아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할머니와 어머니였다. 1주일에 한번 찾아뵙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아버지도 뿌듯해하셨다. 며느리인 어머니에게 눈치를 주면서도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할머니의 얼굴에도 사라진 미소가 찾아왔다. 할머니가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와 둘째 형 부부는 신기해하였다.      


 할머니에게 손자인 나를 돌봐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신혼인 둘째 형의 아이가 태어나기만 기다리고 계셨다. 할머니는 틈만 나면 전주 천으로 나가셔서 미나리 등 온갖 나물을 채취해 오셨다. 고등학교 2학년이 시작되는 봄부터는 아예 채취한 나물을 전주에서 가장 큰 시장인 남부시장에 내다 파셨다. 점포도 없이 시장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거의 매일 나물을 파셨다. 비록 푼돈이지만 할머니는 당신만의 루틴이 생기자 더 큰 활력이 생기셨고 심지어 회춘이라도 하려는 듯 젊어지고 건강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그 전에는 할머니가 심하게 늙어 보였다거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할머니는 매일 신바람(?)이 나서 밥을 하셨고 직접 채취한 나물로 반찬을 만드셨다. 자주 생선을 사 오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생선을 아주 좋아하셨다. 아버지도 그랬고 나도 그렇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는 생선을 사 오신 것이 아니었다. 채취한 나물들이 팔리지 않을 때마다 생선 가게에서 나물과 바꿔 오셨던 것이다. 나 같으면 그 나물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버렸을 텐데, 할머니의 수완이 좋았다기보다는 그만큼 할머니의 삶은 치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는 무와 묵은 김치를 넣은 고등어조림과 조기보다 작은 황색어(황강달이)라는 생선을 자주 상에 올리셨다. 갈치구이는 기본이었다. 고향마을 산골에서는 생선이 귀했다. 5일장이 열리는 날에야 생선 구경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짜기로 악명 높은 간 고등어가 자주 밥상에 올라왔었다. 할머니는 싱싱하고 통통한 생물 고등어조림을 아주 좋아하셨다. 냄비에 무를 깔고 그 위에 묵은 김치를 올린 다음 고등어를 맨 마지막에 올리셨다. 할머니의 양념장은 특별한 비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맛은 일품이었다. 지금은 아무리 할머니가 하던 대로 똑같이 해보지만 그 맛이 나질 않는다. 가스가 아닌 연탄의 독특한 불 맛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할머니만의 눈대중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세월이 주는 그 눈대중은 계량컵이나 저울로도 따라갈 수 없는 맛을 냈던 것이다.     
 

할머니표 해물대파라면. 아쉽게도 대파는 결국 구하지 못했다. 대신 해물을 듬쁙~~


 조카가 태어나면서 나는 할머니와 헤어져야 했다. 대학 진학으로 인해 전주를 떠나 상경해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매일 밤 12시면 연탄불에 라면을 하나 끓이셨다. 해물과 파를 넣은 할머니표 라면은 나의 밤참이었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 3년간을 라면을 끓여주셨다. 그것도 밤 12시에.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끝나면 다시 학교 도서관에서 11시 40분까지 공부를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정확히 밤 12시였다. 너무 출출한 시간이기에 라면이 물릴 만도 한데 매일 할머니표 라면을 먹었다. 물론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한동안 라면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너무 먹어서 질린 것이다. 덕분에 다른 면 종류와도 연을 끊었다. 그 흔한 짬뽕이나 냉면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으로 이민오던 첫 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내의 출산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할머니의 부고를 접하고도 한국에 갈 수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겨울에 한국은 물론 런던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나는 매일 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그 당시 런던에서 한국 라면은 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할머니표 라면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애도했다. 가끔은 생물 고등어를 사다가 할머니가 하시던 대로 냄비에 영국식 기다란 무를 듬성듬성 잘라서 깔고 시중에 파는 귀하디 귀한 김치를 얹은 다음 생물 고등어를 얹고 할머니표 양념장을 만들어 골고루 뿌려주었다. 양념장에는 진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약간, 다진 마늘, 생강 약간이 전부였다. 한 소금 푹 끓여준 다음 마지막으로 파를 올리면 요리 완성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할머니표 라면과 고등어조림을 해 먹는다. 할머니표 라면에는 해산물들이나 대파가 들어가야 한다. 대파가 없으면 쪽파나 실파라도.
      

 조카의 결혼식 날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에게 할아버지란 존재는 너무 막연하기만 하다. 젊어서 과부가 된 할머니는 여러 차례 사랑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곤 하였다. 사춘기가 늦게 온 나는 그때 막 사랑에 눈을 떠서 무한 방황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토록 무서운 것인데 할머니는 그 세월을 왜 그리고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하셨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할머니는 항상 같은 답변을 성의(?)도 없이 툭 던지곤 하셨다.

 "그때는 다 그랬어! 이젠 사랑 따위는 늙어서 포기했고. 너네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단다. 외할아버지는 큰 딸인 네 엄마가 12살 때 서울에서 폭격으로 돌아가셨지. 난 네 외할머니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나은 편이란다. 청상은 면했으니깐! 너네 외할머니는 정말 청상과부란다. 외할머니께 잘해드려라."

   

 사실 할머니는 결혼 전에 같은 동네에서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의 어머니는 중매쟁이를 통해 할아버지와 결혼을 시켰고 할머니는 딱 한번 그것도 스치듯 얼굴만 본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남자가 바로 나의 할아버지였다. 결혼과 동시에 할머니의 사랑은 강제로 사귀던 동네 오빠에서 남편인 할아버지로 바뀌어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여자 친구를 잃어버린 동네 오빠는 결국 마을을 떠났고 그 후로는 소식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오빠를 수소문해서 찾았지만 그 오빠 또한 결혼을 해서 가정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혹시라도 그 오빠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그 오빠와 재혼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 의지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았고 할머니는 평생을 청상과부로 살아야만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왜 다른 남자를 찾지 않으셨을까? 주인공 토마시의 정부 테레자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는 사랑의 방법론을 몰라서도, 용기가 없어서도 청상과부로 살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그 시절의 여자에게는 재혼 자체도 흔치 않았고 따라서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혼자 살다가 돌아가셔야만 했다. 물론 할아버지들은 그렇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대부분의 할머니들에게 혼자 사는 일이란 흔하디 흔한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피할 수 없는 본능과 그 본능이 지배하는 욕구를  해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돌이켜보니 고인이 되신 할머니도 어머니도 같은 여자였고 우리와 똑같은 본능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었다. 사회와 문화가 만들어내는 관습이 한 개인의 평범한 삶에 얼마나 지독한 폭력을 행사해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주인공 토마시처럼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며 수많은 여자를 탐닉하는 두 번째 부류의 호색한의 사랑법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바람둥이들은 여자의 신비로운 그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그 신비로움은 따로 존재하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은 변태 성향이 있는 기이한 여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집착형의 사랑이든 호색한의 사랑이든 그 사랑의 당사자들도 결국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부여한 것이 섹스다. 물론 동물들도 섹스를 한다. 그런 동물과는 달리 종족보존을 위한 번식 이외의 쾌락을 섹스를 통해 즐길 수 있는 것이 인간만의 특권이다. 하지만 이 특권은 그 시절까지만 해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할머니나 외할머니처럼 여성들이 이 특권을 사용하지 못하는 시대는 야만의 시대였다. 세월이 변했어도 지금도 일정 부분은 남성들이 특권처럼 누리려 든다. 할머니처럼 사는 일이 당연한 것인지, 아니면 토마시처럼 남용하는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간에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회와 문화가 만들어낸 부적절하고 잔인한 관습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두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오래전이었다. 내가 대학생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에게 외롭지 않으세요?라고 여쭈어봤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농담처럼 답변하시곤 하셨다. "좋은 영감탱이 있으면 하나만 데려와 보렴!" 오늘도 할머니표 라면으로 점심을 먹어야겠다. 그런데 식당에 합은 있는데 대파가 없다. 큰일이다. 아무래도 잠깐 아랫마을에 "파서리"를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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