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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급조해낸 멸치 미역국!

음식이 우릴 구원해줄 수 있을까

by 런던남자


20200325_123400.jpg 2020년 4월 안성 공도면의 어느 식당에서 먹은 미역국



영국 병원에서의 출산 후의 아침식사로 나온 토스트와 얼그레이 홍차 한잔

20년 전, 영국으로 이민 간 지 몇 달만에 아내는 런던의 어느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도왔다. 아니, 아무것도 돕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면서 여자의 고통과 인생을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여자들만의 삶과 생각들이 뭉뜽그려진 채 작은 세상을 이루는 어떤 성역이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내가 끓여낸 "멸치 미역국"도 그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출산을 마친 아내는 샤워를 했다. 도중에 잠깐 졸도를 해서 놀랐다. 다행히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내를 부축해 옷을 입히고 다시 아내는 침대에 누웠고 한 시간 정도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내가 단잠을 깼을 때 아침으로 나온 토스트와 홍차는 이미 식어버렸다. 아내는 딱딱해진 빵조각과 밋밋하면서 떫은 얼 그레이 홍차 앞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차가워진 얼 그레이 홍차 몇 모금을 마신 아내는 토스트를 먹을 입맛도 기력도 없었다. 한국에서 1등급 한우의 양지가 듬뿍 들어간 "친정엄마표 미역국"도 먹을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다.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맛대가리라고는 1도 없는 토스트와 홍차라니, 기가 막혔다. 아내에게 인생에서 가장 "미안한 순간"이기도 하였다. 나는 미역국을 급조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미역국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거무튀튀하면서도 미끈거리는 맛이 싫어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역국을 끓여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민 온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한인 타운 내에 지인도 없었다.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나 장모님께 전화해도 영국에서 한우를 구할 수 없으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미역국을 끓여와야만 한다. 그래서 아내가 맛있게 먹고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산후조리의 시작은 미역국부터인데 왜 나는 한우를 구해볼 생각조차 안 하고 덩그러니 한국산 최고급(?) 미역만 확보해 놓고 안일하게 있었던 것일까! 앙꼬 없는 찐빵은 결코 찐방이 될 수 없듯이 한우가 들어가지 않는 미역국은 미역국이 될 수 없었다. 그 당시 나의 인식은 더 이상 영역을 확장하지 못한 채 딱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해 가을에 영국으로 이민을 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첫 번째 해가 바뀌었다. 해가 바뀌기 직전에 한국에서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할머니의 장례식까지 마치고 나서 내게 연락을 주셨다. 어머니는 어차피 미리 알려주어도, 아이 출산 때문에 오지 못한다는 걸 감안해, 미리 알리지 않으셨다고 했다. 전주에서 고등학교 3년을 마칠 때까지 매일 따뜻한 밥과 밤참을 해주시던 할머니의 부고는 슬픔을 넘어서 세대교체를 의미하였다. 한 세대가 지고 또 다른 세대가 질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그 세대에 합류할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대 또한 출현할 것이다. 어쩌면 새로 태어날 아이는 할머니와 바통 터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 전에, 나는 아내와 함께 병원에서 매주 출산 관련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전혀 불안하지 않을 줄 알았다. 출산일이 다가오면서 아내는 부쩍 힘겨워했다. 육체의 변화가 주는 힘겨움보다도 주변에 친정어머니나 할머니와 같은 듬직한 어른은 고사하고 언니나 여동생 하나 없다는 것이 더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1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부터 아내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나는 미니캡을 불러 아내가 출산할 산부인과가 있는 West Middlesex Hospital로 출발했다. 아이 옷과 기저귀 분유 등 출산용품을 고이 담은 가방은 오래전부터 준비해둔 상태여서 가지고 가기만 하면 되었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차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이 거리를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매주 목요일 저녁에 출산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한 시간 가량 소요되었다. 아이도 태어나는데 중고 자동차라도 한대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니캡이 리치몬드의 다리를 건너는 그 시간쯤이었을 것이다. 왜 그 중요한 시점에서 중고 자동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태어날 아이에 대한 선물이자 배려라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미니캡은 거의 정확히 15분 만에 West Middlesex Hospital의 산부인과 병동 앞에 우리를 내려주고 떠났다. 나는 아내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매주 보던 그 모습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출산 대기 중인 산모들이 한 손으로 아랫배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이번엔 두 명이었다. 더 많을 때가 많았다. 산부인과에 도착하자마자 산모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하였다. 체크가 끝나자 출산 대기 병실로 옮겨졌고 우린 거기서 기난긴 공포의 밤을 꼬박 지새워야 했다. 금방이라도 나올 듯한 아이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먼동이 틀 무렵에 잠깐 눈을 부쳤지만 이내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미드와이프들(조산사)은 아이가 금방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분만실로 산모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곧이어 아내는 분만실로 옮겨졌지만 역시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미드와이프들이 이야기하는 진통의 간격에 들어서고 있었지만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나도 옷을 갈아입고 분만실에 들어가서 아내 곁을 지켰다. 아내가 아이를 밀어내려 힘을 줄 때마다 나는 긴장했다. 나는 아내의 양손을 잡고 같이 힘을 주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내 모습을 본 미드와이프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아이를 낳을 거냐고 하며 웃었다. 내가 낳을 수만 있다면 내가 낳고 싶다고 했더니 또 웃었다. 2시간 가까운 사투 끝에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3분 전이었다. 나와 아내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아이가 나오기 직전 무통 주사를 두 번 맞았다. 그때와 아이가 나올 때만 의사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남자 의사는 키가 컸고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았다. 바이킹의 후예라도 되는냥 진한 노랑머리는 반 곱슬이어서 웨이브져 있었다. 영국 병원에서 의사 보기는 하늘에 별 따기인데 정작 의사들은 권위 같은 것을 전혀 내세우지 않아 보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의 손목에 밴드가 채워졌다. 거기에는 아이의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아이는 퇴원할 때까진 번호로 불리게 될 것이다.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우렁차게 울었다. 아이가 자발적으로 울었는지 미드와이프들이 아이가 울도록 조치를 취했는지는 모르겠다. 의사는 내 손에 가위를 넘겨주면서 아이와 엄마를 연결하고 있는 생명줄을 자르라고 하였다. 그 생명줄은 제법 길고 굵었다. 나는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두려웠다. 아이가 10개월 동안이나 의지했던 생명줄을 내 손으로 자르면 혹시라도 뭐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래서 의사 얼굴을 자꾸 보았다. 의사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미소를 보였다. 그래야만 너는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 미소로 말하고 있었다. 두 눈 꼭 감고 탯줄을 자르자 의사는 "Good job!"을 외치며 황급히 다른 분만실로 사라졌다. 탯줄을 자를 때 가위에서 전해오는 그 감각은 결코 숭고하지 않았다. 이상 야릿하면서도 무거운 충만감이 밀려왔을 뿐이다.

의사가 나가자 두 명의 미드와이프는 아이를 닦고 아내에게 샤워를 할 수 있도록 샤워부스로 안내하였다. 영국의 분만실에는 샤워부스가 있어서 출산 후 바로 샤워를 시켰다. 한국에서도 그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내는 샤워를 해야 한다는 말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하였는데, 피도 많이 흘렸는데, 무엇보다도 탈진 상태인데 샤워를 하라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아내는 샤워부스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 도중 결국 주저앉았다. 잠깐 실신을 한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욱 황당한 일은 아내가 어렵게 부축을 받으며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일어났다. 이번에는 미드와이프가 아침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물론 내 것은 없었고 산모인 아내의 식사만 준비되어 있었다.

산모의 아침식사는 놀랍게도 토스트와 얼 그레이 홍차였다. 미역국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영국의 산모들은 그것이 당연한 식사였다. 한국처럼 미역국 같은 특별식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시내에 나오는 산모 중에는 아이가 1주일도 안된 경우도 있었다. 한눈에도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외출을 할 정도로 출산에 대한 산모들의 인식이 달랐다. 물론 문화의 차이기는 하지만 체질과 체형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뭉근하고 오래오래 끓이지 못한 멸치 미역국



잠깐 잠들었던 아내는 깨어나자마자 토스트와 홍차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토스트를 먹지 못하고 차만 몇 모금 마셨다. 입원실로 옮겨지면서도 아이의 건강 체크는 수시로 이루어졌다. 나는 적당히 눈치를 봐서 집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집에는 한국산 미역이 있었다. 미역국은 두 가지로 끓였다. 하나는 소고기를 넣고 또 하나는 멸치를 넣고 끓였다. 맛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싼 잉글랜드산 소고기만 먹어봐서 영국에서는 소고기가 가장 맛없는 고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국에도 한우 못지않은 스코틀랜드산 소고기가 있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런던 시내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후배 L부부도 몰랐다. 그들도 싸구려 잉글랜드 산 소고기만 먹었을 터였다.


한 시간 반 만에 두 가지의 미역국이 끓여졌다. 잉글랜드 산 소고기 미역국은 내가 먹어봐도 아무 맛이 나질 않았다. 심지어 누린내까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마늘을 아무리 많이 넣어도 그 냄새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절망이 밀려오는 순간의 세상은 언제나 백지처럼 흰색의 물결들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중요한 시험에서 1번부터 막혀서 2번을 푸는데 2번도 막힐 때 맨 뒤의 문제로 간다. 그런데 맨 뒤의 문제도 답을 알 수 없을 때는 절망했다. 물론 이런 일은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자주 일어났고 그때는 어김없이 오줌을 지리거나 몽정을 하였다.

대안으로 멸치 미역국을 같이 끓인 것은 나의 선견지명이었다. 결과론적으로는 탁월한 선견지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안이 될 수 있었다. 멸치 미역국은 처음 끓여보지만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 근거로 모든 육수에 멸치가 빠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기장미역과 마찬가지로 멸치 또한 어머니가 한국에서 공수해주신 최상급(?)의 남해 죽방멸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이 미역과 멸치가 아직도 한국 최고인지는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끓이는 절차나 방법은 몰랐다. 믿을 것이라고는 오직 나의 "감"뿐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인터넷을 찾아볼 겨를이 없었다. 당시 영국의 인터넷은 전화선을 타고 들어오는 인터넷이었다. 영국 인터넷이 느리기로는 세계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몇 번 먹어보지도 않은 미역국을, 그것도 정통이 아닌 이단 미역국을 끓이는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멸치 미역국도 실패하면 나는 아내 볼 면목이 없어질 것이 자명했다. 어쩌면 평생을 말이다.

나만의 멸치 미역국은 너무도 간단했다. 소고기 미역국처럼 미역을 잠깐이지만 먼저 불린 다음 들기름으로 살짝 볶은 멸치를 끓는 미역국 냄비에 투하하면 끝이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보내주신 마른 홍합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내가 술안주로 즐겨 먹는 마른 홍합이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또 하나의 히든카드는 처가에서 보낸 마른 표고버섯이었다. 이 둘을 물에 잠깐이라도 불릴 것인가! 끓는 냄비에 직접 투하하는 것이 효율적인가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이론상으로는 물에 불려야 마땅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물에 잠깐 씻은 다음 바로 투하했다. 미역국은 오래 뭉근하게 끊여내야 맛이 있다는 것쯤은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결혼 전까지 어머니는 내 생일날마다 전화하셔서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으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미역국 끓이는 방법을 알려주시곤 하셨다. 다른 것들은 생각이 나질 않는데 “뭉근하게 오래오래”라는 말은 이상하게 잊지 않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결혼 전의 나는 세상을 함부로 막살고 있었다. 내 생일날 혼자 사는 나에게 셀프 미역국을 선물할 만큼 바른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냄비 두 개에 동시에 진행된 미역국 끓이기는 끝나는 것도 동시였다. 1시간 반 동안 샌 불로 끊였다. “뭉근하게 오래오래”라는 말은 귓전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지금 당장 미역국이 필요하였다. 멸치를 넣고 끓고 있는 미역국 냄비에는 추가로 마른 홍합 몇 개와 마른 표고버섯 몇 개가 들어갔다. 다진 마늘과 약간의 소금이 들어가고 나니 더 이상 넣을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감과 지식의 한계였다. 중간에 계속 맛을 보지만 별다른 맛이 나질 않아 애가 타들어갔다.

왜 아무 맛이 나질 않는 것일까! 뭔가가 더 들어가야 했다. 아무리 찾아도 조미료인 “다시다”“미원”은 아예 없었다. 대신에 한국에서 보내준 까나리 액젓멸치 액젓이 보였다. 멸치 미역국에 멸치 액젓을 넣으면 맛이 중복되어서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까나리 액젓을 조금 넣었다. 맛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간장도 조금만 넣고 싶었는데 참았다. 자꾸 뭔가를 넣어서 나아질 맛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뭉근하게 오래오래”였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그렇게 커다란 냄비에서 끓여진 멸치 미역국은 반을 덜어서 중간 냄비에 담았다. 뚜껑을 덮고 밥과 김치를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김치 냄새가 자꾸 신경 쓰였다. 택시나 미니 캡을 탔어야 했다. 하지만 마침 버스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버스를 탔다. 1층보다는 2층이 한가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덜컹거리는 2층 버스에서는 미역국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정작 김치 냄새만 신경을 썼는데 미역국에도 진한 냄새가 있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평생 한번 있는 나의 숭고한 “멸치 미역국 수송 대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나서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오직 검증되지 않은 멸치 미역국의 맛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기쁨도, 아빠가 되었다는 자랑스러움도 검증받지 못한 멸치 미역국의 맛에 무기력해질 뿐이었다. 냄비는 계속 출렁거렸고 그때마다 미역 국물이 조금씩 새기도 했다. 압력솥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냄비를 안고 있는 내 모습은 뭘까!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가 갑자기 훅하고 치고 들어오는 것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방금 출산한 아내에게 정체불명의 이단 같은 멸치 미역국을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노래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한우를 한국에서 공수해 와서라도 한우의 양지가 들어간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주었어야 했다. 버스가 덜컹거리고 국물이 흘러내려 내 바지가 젖을 때마다 내 눈가도 젖어가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에는 온갖 회환이 다 묻어 나왔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만큼이나 참담했다.

결혼 전까지 한국에서의 7년의 직장생활 동안 남은 것은 마이너스 통장뿐이었다. 입사하자마자 충동구매처럼 신차를 뽑고 금방 중산층에라도 편승할 것 같은 소비를 일삼고 살았다. 하루 저녁에 100만 원이 넘는 술값을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나의 카드로 지불하기도 했다. 6개월 할부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손가락 여섯 개를 친구들 몰래 보이면서. 일반 술집에서 100만 원을 결재하려면 모든 테이블 술값을 다 내주어야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룸살롱”이라는 형태의 술집이 많았다. 아가씨들이 곁에서 술시중을 들면서 매출을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하면 딴 세상이 펼쳐지기도 하는 곳이다. 여자 앞에서 마초가 아닌 남자들조차 없던 마초의 기질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허세와 허영의 향연이었다. 검사들이나 마시는 폭탄주를 마셔가면서 마치 검사들이 사는 상류층에서 논다는 착각이 들었다. “술이 샌 척, 돈이 많은 척, 용감한 척, 잘난 척,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자인 척, 여자에게 다정한 척“

처음에는 직장 상사와 접대를 받기 위해 다니던 곳이 언제부터인가는 내 카드를 쓰며 동기나 친구들에게 과시용으로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N분에 1이 원칙이었고 잘 지켜졌지만 어느 순간에는 나처럼 무너지는 청춘들이 있었다. 다음날에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책상을 치며 후회하지만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과시욕도 도박이나 마약처럼 일종의 중독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예쁜 아가씨들 앞에서 “갑질”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병폐를 논하면서 나는 자본주의의 수렁 한 복판으로 그렇게 매달 노를 저어서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배는 늪에서 처박혀 꼼짝달싹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정작 결혼에 대한 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혹독한 대가를 영국에 이민 와서 접하고 겪으며 마침내 버스 2층의 중간쯤의 좌석에 앉아서 눈물 보따리가 터져 버린 것이다. 마침 버스는 리치몬드에 들어서서 템스 강 위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내 눈물은 창밖으로 날리지 못한 채 버스 안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눈물들은 차라리 강물로라도 떨어졌으면 좋으련만. 1월 중순의 한 겨울에 버스는 모든 유리창을 꽁꽁 닫아놓고 히터를 연신 틀어대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눈물 대신 빗물이 강물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여전히 내 무릎에는 멸치 미역국이 든 양은 냄비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국물이 바지를 적셨지만 나는 냄비를 옆자리나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마치 속죄라도 하듯이.

마침내 시야에 West Middlesex Hospital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빨간 STOP 버튼을 눌렀다. 버스는 병원 앞에서 정차했고 냄비를 가슴에 안은 채 버스에서 내렸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은 악몽 그 자체였다. 기사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내 바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바지는 절반쯤 젖어 있었고 비릿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영국 사람들에게 낯선 멸치와 미역 냄새가 다가서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미지의 바다 냄새였는지도 모른다. 그들도 잘 모르는 그 어떤 냄새는 버스 내부의 히터에 의해서 “뭉근하게 오래오래” 순환되어 영국 사람들의 코 점막을 자극하며 쳐들어갔다.

아이는 8시 3분 전에 출산했지만 아내는 아직 먹은 것이 없었다. 고작 홍차 한잔이 전 부였다. 그나마도 홍차는 반 정도도 마시지 못하였다. 마음이 급했다. 나는 아내가 입원해 있는 산부인과 병동을 향해 뛰었다. 뛸 때에도 여전히 멸치 미역국 냄비에서는 국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West Middlesex Hospital의 산부인과 병동은 입구 쪽에 있었다. 막 들어서려는데 익숙한 풍경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한 손으로는 아랫배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는 영국의 젊은 산모들이다. 오늘이나 내일 출산할 산모들의 배는 말 그대로 남산(?)만 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 산모들은 마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비현실의 세계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아내가 미역국과 밥을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마침내 아내가 입원해 있는 입원실에 들어섰다. 6인실이었는지 4인실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에 남는 일은 아내가 그 맛없는(?) 멸치 미역국을 한 그릇 비워주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오랫동안 미역국을 먹었다. 밥과 김치도 먹었지만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가 무탈하게 태어난 기쁨과 달리 10개월 동안이나 몸에 지니고 있던 아이가 일순간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 느꼈을지도 모르는 허탈함의 무게를 생각해보았다. 희열과 환희 뒤에 따르는 깊고 진한 외로움! 단순하기 그지없는 나 따위가 이해할리 만무한 그 외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내는 그렇게 끼니마다 내가 끓여온 멸치 미역국을 먹었다. 지금도 아내에게는 한편으로는 죽을 만큼 미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을 만큼 고맙게 생각한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생애 첫 멸치 미역국을 자신이 아닌 못난 남편을 위해 먹어준 아내였다. 지구 반대편으로 이민을 온 지 몇 달 만에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뭉근하게 오래오래” 끓여내지 못한 나의 “이단” 멸치 미역국과 함께.

어제저녁에 카톡이 여섯 번 울렸다. 엄마와 함께 런던에 살고 있는 아들로부터 여섯 장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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