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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01. 2020

이민 첫날, 런던 지하철에서 숨고 싶었다

제4화.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L의 민박집으로 가는 길

                                                          

 2년 반 만에 런던에서 만난 후배 L은 변해 있었다. 강인하고 자신만만하게. 그가 2년 동안 했을 고생들에 부끄러워졌다. 그의 모습에서 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자 후배 L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린 지하철을 탔다. 차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L은 지하에 있다고 대답해서 정말 지하 주차장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의미한 지하는 지하철이었다. 나와 아내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많은 짐들을 가지고 지하철을 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배 L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성격도 좋고 항상 웃는 표정의 선한 남자였던 L은 변해 있었던 것이다. 2년 동안 런던에서 민박집을 하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싸구려 중고차라도 한대 살법 한데 차가 없었다니! 

 후배 L이 운영하는 민박집 홈페이지에는 "무료 공항 픽업"이 팝업창으로 항상 떠 있었다. 그래서 차가 있는 줄 알았다. 그 많은 픽업들을 어떻게 혼자 해 낼 수 있었을까? 그 무거운 이민 가방들을 지하철을 통해 두 번씩이나 환승해서 날라 주었을 L을 생각하니 눈씨울이 뜨거워졌다. L이 한 고생들은 세상 물정 모르고 편하게 월급날이나 기다리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나는 입사하기 무섭게 친구의 영업에 말려 그날 신차를 3년 할부로 뽑았다. 주말이면 봉사를 다닌답시고 신차에 아가씨들을 태우고 다니며 젊음을 흥청망청 소비하고 있었다. 월세에, 할부에, 유흥비에, 쇼핑까지 월급이 많아져도 마이너스는 줄지 않았다. 


 지상을 달리던 피카딜리 라인의 지하철은 다시 지하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내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L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순간 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쓰고 있었다. 어학 연수생 시절의 런던 생활이었는지, 7년간의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시내로 접어들수록 좁아터진 지하철은 인파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생각도 집어치웠다. 런던에서 1년 반 동안의 어학 연수생 시절, 매일 이용했던 런던의 지하철!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익숙한 런던의 지하철 노선도! 낡고 익숙한 공간! 그 공간에서 편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분명, 젊은 날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할 수 있는 멋진 날이었다. 하지만 한가했던 지하철이 붐비기 시작하자 다른 승객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참 푸른 꿈과 원대한 포부를 이야기하고 있어야 할 공간에서 나는 기껏 타인의 시선이나 의식하고 있었다. L처럼 떳떳하고 뻔뻔해지지 않으면 런던의 이민 생활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인파가 많아질수록  말수는 적어졌고 지하철 안에서 나는 점점 길을 잃어가고 있었다. 희망찬 미래는 초라한 현실의 짐에 눌려서 신음조차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다. 눈앞의 현실을 무시하고 미래의 멋진 꿈들을 꺼내보기에는 아내에게 미안했고 L에게조차 부끄러웠다. 우리 앞에는 점점 크고 무거워 보이는 어마어마한 짐들이 현실을 즉시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30킬로의 이민가방 4개, 기내용 케리어 2개, 중간 사이즈의 배낭 2개가 나의 현실이었다. 내 옆에는 임신한 아내가 앉아있었고 후배 L은 우리 앞에 서서 아내와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L은 런더너들의 시선 따위에는 1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짐들을 앞세우고 첫 번째 환승을 마치자 내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귀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만 맴도는 낯선 소리들이었다. 그 순간 나의 뇌리에는 "익숙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영국식 영어와 런던의 지하철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런던 또한 결코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상,  들고 있는 가방의 스타일, 헤어스타일, 신발, 말투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뱉는 영국식 영어도, 우리가 타고 있는 지하철도, 지하철 역들은 물론이고 음습한 공기마저도 모두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영국 영어는 게르만족의 언어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들렸고 지하철의 계단들은 파리 몽마르뜨 언덕의 계단만큼이나 힘겹게 느껴졌다. 런던의 지하철은 마치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깊고 낡았다. 



 학생 때는 그렇게 멋져 보이던 런던의 튜브(지하철의 애칭)는 정말 치약 튜브만큼이나 작아 보였다. 지하철 역들은 100년 전의 촌스러움과 100년 후의 할렘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줄 뿐이었다. 아마 평양의 지하철도 이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 꼬이며 빈정이 상해 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에어컨이나 스크린 도어 따위도 없었다. 물론 쥬빌리 라인 등 비교적 최근에 건설된 라인들에는 스크린 도어가 있기도 하지만. 이런 낡은 지하철에서의 두 번의 환승과 우리 짐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시선들를 받아내며 후회가 밀려왔다. 이삿짐을 선편으로 부치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인천공항에서 오버 차지로 낸 100만 원이면 부치고도 남았을 텐데!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것일까! 나란 인간은 언제까지 이렇게 무모하고 대책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는 그런 나의 모습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L은 좋은 후배였다. 넉살도 좋고 성격도 밝았다. 세계 어딜 가서도 잘 살 수 있는 "붙임성"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한 때는 그의 와이프가 될 S와 함께 그를 "푼수"라고 놀리기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영국으로 이민 오기 2년 반 전이었다. 퇴근 무렵이었다. S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우리 지하 호프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퇴근하면 내려와" L부부는 내가 근무하는 빌딩의 지하 호프에서 3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쯤에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었다.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만 했지 구체적인 용건은 말하지 않았었다. 나는 이들 부부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척 궁금하였다. 혹시 나에게 아가씨를 소개해주려고 그러나! 그러기에는 둘이서 친히 내 직장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지하로 서둘러 내려갔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사뭇 진지했다. 영국에서의 비즈니스 컨설팅을 의뢰해온 것이다. 비용은 내가 좋아하는 생맥주로 대처하겠다면서 맥주는 얼마든지 마시라고 했다. 당시 신혼이었던 L부부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취직이라는 루틴을 깨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고. 이 커플은 결혼 전에도 몇 번 만나서 같이 맥주를 마셨지만 해외 이야기는 여행 정도가 전부였고 가끔 런던에서 살고 싶다고만 하였다. 그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서둘러서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영국에 대해 나에게 자주 질문해 왔다. 어떡하면 영국에서 돈을 벌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딱히 조언해 줄 만한 입장도 아니고 그럴만한 경험조차 없었다. 어학연수생 신분으로 고작 1년 반 머물렀던 내가 영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해외 이민이나 해외취업 전문가도 아닌데 번지수가 틀렸다고 말하려고 했다.  

 

  비교적 차분한 성격의 S는 치킨을 안주로 시켰다고 했다. 테이블에는 생맥주를 한잔씩 비웠는지 500cc 빈 잔이 2개 보였고 다시 주문한 3개의  500cc 생맥주가 나와 있었다. 생맥주잔에는 기포들이 부지런히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건배를 제안하기 무섭게 L의 아내 S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영국에서 단기간, 구체적으로 3년만 (개)고생해서 돌아와 한국에 아파트를 사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한국에서는 평생 모아도 아파트 사기가 쉽지 않아서! 난 자동차 할부도 싫고 대출받아서 집사는 건 더더욱 싫거든! 그러려면 한국보다 물가가 월등히 비싼 영국이나 서유럽 국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느 나라가 좋을지 알려줘!라고 바로 치고 들어왔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나는 보다시피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월급 벌레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번지수를 잘 못 찾아온 거 아냐? 라며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제법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영국이라는 나라와, 런던이라는 도시, 한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도미토리 민박까지 컨설팅을 해주고 있었다. 나는 겨우 런던에 연수차 1년 반 살다온 게 다였는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딱 그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 선무당 덕분에 그들은 정말 서울의 한참 외곽이기는 하지만 수도권에 아파트를 샀다. 예상했던 3년보다 1년이 더 소요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부동산의 폭등으로 어렵지만 그때는 그게 가능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L부부는 술자리에서 내가 한 말을 그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런던 어학연수 시절 어학연수생 신분으로 영어 학원을 차려 제법 큰돈을 벌었다는 그 이야기를 말이다.(어학연수생이 런던에 영어학원을 차렸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왔다고 했다. 기억력 참 좋다. 나의 무료 컨설팅이 있고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L부부는 어느 날 갑자기 런던으로 떠났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존 2의 센트럴 라인 역 근처의 집을 한 채 빌려서 한인을 상대로 한 민박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민박집 홈페이지와 도메인 이름까지도 내가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사이 나도 갑자기 결혼해서 영국으로 이민을 온 것이다. 그래서 L이 히드로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고 그 민박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L의 민박집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L의 눈부신 활약으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마침내 L이 사는 동네의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신호를 건넌 다음 홈베이스를 마주 보고 우측 신호를 건너서 침대 가게 2층에 있는 집이었다. L은 민박집에 전화를 해서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L의 민박집은 상가 2층에 있었다. 철재 계단을 올려다보던 아내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L에게 미안한 마음에서였고 나에 대한 원망 때문에 나온 한숨이었을 것이다. L은 번개처럼 가방들을 들어서 옮기고 있었다. 아주 익숙한 자세였고 순식간에 가방의 공간이동은 끝이 났다.   

  

 민박집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손님들 저녁식사 준비를 하던 L의 아내 S가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민박집 환경은 가난한 배낭여행객들을 위한 도미토리형 숙소였다. 그 좁은 방에 이층 침대 4개가 들어가서 8명이 자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다행히 비수기여서 우리는 작은 가족실을 하나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의 예상 체류 기간은 1주일이었다. 1주일 내에 우리가 런던에서 살 집을 임대할 계획이었다. 첫날은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저녁을 먹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나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홀몸도 아닌 아내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현기증이 날 만큼 미안하다. 왜 당시엔 아내의 손을 잡고 힘들지! 하며 말 한마디 건 낼 생각조차 못했을까! 비록 립서비스 일망정.    

 평범함이 싫어서, 이미 막혀버린 신분의 수직이동의 방법을 찾아서 떠나온 이민이었지만 첫날부터 이처럼 강행군이 될 줄은 몰랐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한국과의 시차 때문이기도 했지만 새벽에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하면 런던의 화려한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다시 우울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곤하게 잠든 아내를 한참을 바라보다 민박집을 나왔다. 우산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라도 걷지 않으면 밀려드는 허무와 그로 인해 생겨나고 있는 "나약함"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실패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조바심들로 인한 "불안감"들을 런던의 뿌연 거리에 묻어두고 싶었다.   

  나는 겉으로는 아주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상당히 불안했다. 내가 아무리 두둑한 배짱이 있고 결단력과 용기가 있다고 해도 여기는 더 이상 한국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혼자였고 가진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통하던 학벌도, 양국 국기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대사와 미팅을 하던 직장도, 인맥도, 친구도, 부모님이나 형제도 8천 킬로미터 이상 거리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거기에다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도 넘어야만 했다. 모든 것을 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해결하고 때로는 없던 길을 만들어서 홀로 걸어야만 할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뭐가 있는지, 어디에서 갈림길이 있는지, 갈림길에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은 알 수 없었다. 내가 처음 가는 길이 곧 길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뿌리를 내려 보지도 못하고 국제미아나 난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L처럼 성격이 긍정적이거나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촌놈에 사실 숫기도 별로 없었다. 물론 가진 것도 없었다. 그게 나의 본질이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런던의 이른 아침 거리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뿌연 물안개 때문인지 멀리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벼운 두통과 함께 속이 울렁거렸다. 순간 현기증이 몰려왔다. 장거리 비행으로 인한 피로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L의 자신감과 강인함이 주는 충격 때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그 둘을 L에게 빼앗겨버린 기분이었다. 겨우 이민 둘째 날인데 갑자기 "교환 반품"이라는 단어가 아른거렸다.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는데, 벌써부터 약해지거나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현기증이 났던 것이다. 이젠 한국에 돌아가도 직장도, 집도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런던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 뿌리가 얼마만큼 내려가야 물을 만날지는 모른다. 마치 사막의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이었다. 

 과연 나의 이민은 성공할 수 있을까!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신분의 수직 이동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초기부터 신분상승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세 명의 식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기반은 다져놓아야 했다. 그다음에 신분 상승을 해도 늦지 않다. 사실, 신분상승이란 돈을 많이 버는 일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속물이 속물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생각이 조금 정리되었지만 여전히 현기증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현기증이었을까! 아니면, 낯선 환경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끼는 실패에 대한 일종의 공포였을까! 거듭될지도 모르는 실패와 또 다른  실패로 인한, 포기하고 싶은 추락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끊임없이 신분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중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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