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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16. 2020

우린 런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국 영주권을 받지 못하면 누구네처럼 추방당한다던데...

 
 눈이 안 보여. 아무것도 볼 수 없다구!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 일이 내게도 찾아온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어느 정도의 불안과 공포로 몰아갈 수 있을까?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놀이하다가 갑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느끼는 공포와는 어떻게 다를까? 어린 시절, 내가 여러 번 강과 저수지에서 익사할 뻔하면서 느꼈던 공포는 하얀색 이거나 검은색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불편이나 불안을 나 같은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일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눈이 먼다고 해도 단두대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내밀고 있는 사형수의 공포만큼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공포일까? 불안과 절망이 키워낸 괴물은 단순한 공포일까? 아니면, 오히려 평온한 흑 또는 백의 세계에서 안위할 수 있을까? 어쩌면 너무도 막연하기도 하고 구체적이기도 한 현실의 삶에 대한 상실과 애증이 교차할지도 모른다.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에 적나라하게 그려진 무한과 극한의 공포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영국 이민 초기에 내가 마주했던 불안은 형체도, 이유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공허한 것이었다. 친구도, 가족도, 지인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빈손으로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중압감! 아름다운 꿈과 희망에 찬 미래도 잠시 접어두어야만 했다. 하루하루를 생존해내는 삶은 단순해 보이다가도 앞이 보이지 않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 아주 가까운 미래조차 그려지지 않는 생활에서 느끼는 불안은 자주 공포로 영역을 넓혀가곤 했었다. 실제로 그 공포를 마주할 때마다 당당함이나 긍정의 마인드 따위는 흐물거리거나 희미해져 갈 뿐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고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조차 깡그리 무시할 것만 같았다. 태어날 아이와 아내가 굶고 있다면 빵이나 유유 심지어 고기도 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런 나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까! 나 자신은 선하지만 극한 상황에서도 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민사회에서 정말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악과 손을 잡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가장 큰 절망 중 하나의 절망에 허무해져만 갔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경험하는 일은 슬프지만 이민 사회에서 지극히 평범한 현실이었다. 고객들의 월세까지도 관리해주던 부동산 사장님이나 여행사나 유학원 사장님의 잠적은 한인 사회에 큰 손해와 상처를 남기곤 했다. 나도 막다른 골목에 다 달으면 저렇게 되고 말리라는 생각은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론 짜릿했다. 하지만 인간말종이 되어 세상과 척을 지며까지 삶을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인간의 존재 이유가 생존이라는 원초적인 현실과 마주하는 일은 비극일 것이다. 한국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고, 철거민들이 망루에서 불에 타 죽을 수 있는 이유도 생존 문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절망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더욱더 절망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눈이 멀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나를 지배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느끼는 절망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일 수 있다는 환상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믿었던 사람들이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사는 일이 보장되지 않는, 그래서 내일부터 굶을 수도 있다는 불안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날아든 고지서의 공과금을 납부하지 못하거나 월세나 카드 대금을 연체해서 신용불량자가 되는 일과는 또 다른 생존의 문제들! 사람들이 변해가는 과정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국은 돈 문제에서 만나지만 때로는 그 이상의 극한의 상황과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철썩 같이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친구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돈이 배신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다. 아내가 당했던 배신을 생각하면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비겁하고 이기적인지 알게 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이민 후 제법 시간이 흐른 다음에 벌어졌다. 아이가 태어나서 놀이방에 다닐 즈음이었으니까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을 것이다.

 후배 L의 민박집에서 1주일을 체류하며 쉬엄쉬엄 우리가 렌트할 집을 알아보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런던에서 집을 렌트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국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부동산 서너 곳을 다니며 금방 깨달았다. 어떤 곳은 레퍼런스를 요구하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비자를 보여달라는 곳도 있었다. 할 수 없이 몇 안 되는 한인 부동산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갈 집은 중요했다. 그래서 좋은 동네를 고집했다. 문제는 좋은 동네에서 싼 집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을 뿐이다. 런던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후배 L의 민박집에서 나와야 했다. 눈치를 주지는 않았지만 불편했다. 사실 후배 L부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은근히 눈치도 보였다. 그래서 한인 타운에 있는 가정집 민박을 알아보고 적당한 곳을 찾아 예약했다. 후배 L의 도미토리형 민박집은 드나드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안정을 찾고 휴식을 취해야 할 아내가 오래 머물 장소는 아니었다. 그래서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조용한 민박집을 찾았고 그날 저녁에 바로 이사했다. 이사라고 해봐야 작은 케리어 하나씩만 가지고 나왔다. 어차피 집을 구하면 그때 다시 짐을 날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시무시한 이민가방들을 L의 민박집에 잠시 맡겨 두고 나오니 홀가분하였다. 무엇보다 북적거리는 곳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군 전역 후 런던에 어학연수를 와서 1년 반 동안 지내다 돌아갔었다. 그래서 런던의 지하철이나 기차역쯤은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없던 그 시절과 임신한 아내가 있는 이민자의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었다. 그 시절이라면 기차역이나 공원에서 잘 수도 있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우린 후배 L의 민박집에서 나와 시내 관광도 하며 모처럼 여유를 부리기도 하였다. 아내도 L의 민박집이 불편했는지 오랜만에 미소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반나절의 여행자가 되었다가 다시 이민자 모드로 돌아와야 했다. 우린 런던 워털루 역에서 한인타운을 경유하는 기차를 탔다. 분명히 한인타운이 경유지에 떠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우린 기차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잘못 탔다. 나만 믿고 졸졸 따라오던 아내는 이게 무슨 일인지 의아해했다. 어떻게 기차 하나 제대로 못 타는 남자가 런던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한심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끼눈까진 아니었지만 남편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난감했다. 두 번이나 소동을 벌이며 마침내 예약한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내는 내가 미덥지 못한 지 민박집주인과 직접 통화를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자주 의사결정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친절하게도 역 앞에서 기다리다가 우릴 직접 집까지 안내해 주셨다. 민박집은 역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아내는 민박집으로 가면서 기어코 내게 한마디를 했다. 당신의 기억력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고. 머리도 나쁜 사람이 무슨 배짱으로 자신의 기억력을 그 정도까지 맹신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마음이 상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토하나 달지 못했다. 아내는 항상 현명하였지만 나는 덤벙대며 실수 연발이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잘났다고 생각했는지 매번 위풍당당했고 주눅 들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나약한 척하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나의 배짱과 능력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런던에서 살아가는 일이 내겐 아무것도 아니라고, 런던 지하철이나 기차 정도는 노선도를 보지 않고도 다닐 만큼 익숙한 곳이라고, 어떤 일이든 찾아볼 거라고, 찾지 못하면 일을 만들 거라고, 그러니 나를 믿어달라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당신과 아이를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에,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희미한 그림자만이라도 좋으니 볼 수만, 볼 수만 있다면, 거울 앞에 서서 어둡고 뿌연 얼룩을 보며, 저게 내 얼굴이로군, 하얗게 빛나는 부분은 내 것이 아니야, 하고 말할 수만 있다면.
<주제 사마라구, 눈먼 자들의 도시, P102>  


 흔히들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실제로 눈을 감고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나 명상이나 자는 일밖엔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생생하게 그려지듯이 앞이 보이지 않는 일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무서운 일이다. 민박집은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전형적인 조지안 시대의 오래된 집이었다. 역에서 내려 주유소와 오래된 교회를 끼고돌다 보면 두 번째 골목 끝에 있었다. 비가 내렸고 노랗고 붉게 물든 낙엽들만 황량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아이의 부모가 살고 있는 전형적인 가정집이었다. 이층 방 두 개를 손님에게 민박을 내주고 있었다. 학생들이 들어오면 월세 방처럼 오래 살기도 한다고 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땐 중국 학생 커플이 살고 있었다.     

 

 민박집은 아늑하고 조용하였다. 아내는 오랜만에 안정과 평화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1주일이 지나자 시차도 어느 정도 적응해가고 있었다. 한인 타운의 하이스트리트에 자주 나갔다. 하이스트리트라고 해봐애 십자가 모양의 가로와 세로의 길이 전부였다. 그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라운드어바웃이 있었다. 채러티 샾이 많았고 필요할 것 같은 것들도 아주 저렴하게 샀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지고 낙엽들도 뒹굴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가끔 한인 식당에 들어가서 한식을 먹기도 했다. 한국과의 물가 차이를 생각하다 보니 자주 갈 수는 없었다.

 한인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은 영국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식당에서 한국 음식을 먹을 때였다. 구석 쪽에서 한인들이 영주권이나 시민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지며 집중까지 해서 듣고 있었다. 지난달에 누구네 집은 시민권을 받았다거나 누구네 집은 영주권을 받지 못해서 한국으로 추방될 거라는 등의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영주권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거나 만져보고 싶어 졌다. 언젠가는 나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누구네처럼 영주권을 받지 못해서 추방당할까? 너무나도 막연하고 불투명한 미래는 심연의 바다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다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영주권을 받지 못해 나와 나의 가족이 추방당하는 일은 가위눌림으로 나의 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추방이라는 불안과 공포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낮 시간 동안에는 부동산에 들러 우리가 렌트할 집을 보러 다녔다. 런던에서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부동산 직원의 안내로 우리는 많은 집을 보았지만 마땅한 집이 나타나지 않았다. 1주일이 지나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부동산 직원이 먼저 포기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우리는 진상 고객이었을지도 모른다. 돈도 없는 사람들이 부자동네에 살고 싶어 하는 일은 분명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미 우리는 두 자리 숫자의 집을 보러 다니고 있었고 반짝이던 눈망울도 어느 날 갑자기 삶을 포기당한 동태눈처럼 변해갔다.

 집도 인연이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한 집만 더 보자고 해서 보게 된 집이 우리가 살게 될 집이 되었다. 부자동네에도 허름하고 싼 집이 있었다. 투 베드룸 풀랏이었다. 850파운드의 월세에 6주 Deposit(보증금) 집은 밖에서 보기 민방 할 정도로 초라했지만 내부는 깨끗하고 좋았다. 당시 환율 1,800원으로 따지면 150만 원짜리 싸구려 월세였다. 보통 쓰리 베드룸 집들의 월세가 250만 원인 것에 비하면 싼 집이었다. 우리가 마침내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민박집주인 아주머니는 손수 담근 귀한 김치까지 한 통 싸 주셨다. 나와 아내는 감동했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는 2호 한인 가정이 탄생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1주일 동안 매일 반찬도 주시고 아내와 말동무가 되어주었던 고마운 분이었다.      


 비극은 그때부터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그분들과의 비즈니스에 연루되면서 아내는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착하고 선한 사람도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까지 착하고 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돈은 사람을 비루하게도, 비겁하게도 심지어 비참하게도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로 치면 훗날들의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민박집 아주머니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설령 민박집주인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사람이 괴물이 되어가는 현실은 잔인하고 자비 또한 없었다. 런던의 아주 작은 한인 사회에서는 많은 사기와 소송 사건들이 일어났다. 부동산과  여행사 사장님들이 고객의 돈을 들고 잠적하는 일은 유행처럼 번저가고 있었다.       


 사실, 착한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 사기를 당하고 열심히 살지만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질서 정연하고 그런대로 멋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양심마저도 서슴없이 내던지거나 심지어 팔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불공정하고 어이없는 부당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돈은 우리가 볼 수 있지만 그 돈에 휘둘림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휴지에 불과한 세상과 마주한다면, 그래서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진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려지는 약탈과 살육과 무질서에서 다시 착취 계급이 생겨나는 세상! 어쩌면 우리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극한 생존의 문제 앞에서 느끼는 극심한 공포는 인간을 더 타락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인간 또한 교육받은 영악하고 교활한 동물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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