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대부분의 엄마들은 남편 어머니의 아들과 자신의 아들을 이유 없이 차별한다. 팔은 안으로 굽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쩜 그렇게 대대손손 대물림까지 하면서 은근슬쩍 또는 대놓고 차별할 수 있는 것일까? 모순이 따로 없다. 어쩌면 나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혈육 즉 DNA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내의 아들은 혈육이지만 시어머니의 아들인 남편은 혈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남편들이 아내의 부당한 차별로부터 상처를 받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는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혈육이란 개념을 도입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뻐꾸기는 영악해서 자신의 알을 다른 뻐꾸기의 둥지에 몰래 넣어둔다고 한다. 영문도 모르는 다른 뻐꾸기는 자신이 품고 있던 알은 다른 뻐꾸기가 꺼내다 먹은 줄도 모르고 바꿔치기된 알을 자신의 혈육으로 여기며 지극정성으로 돌본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혈육이란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찾아보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내와 나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와는 별다른 고부갈등이 없었다. 사실 있었는데 눈치 없는 내가 모르고 지났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내게 내색은 안 했지만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비록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산다고 해서 그 관계가 희석되거나 약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천 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물리적 거리는 만리장성보다 든든한 장벽이 되어주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아내에게 유일하게 잘한 일이 있다면 바로 나의 이민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고부갈등을 일으키고 싶어도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아내 또한 다른 며느리들처럼 시어머니와 살갑게 지내는 일은 없었다. 물론 살갑게 지내면 좋겠지만 차라리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일이 쉬울 것이다. 아내 성격상 한국의 시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굳이 국제전화까지 걸어가며 안부를 묻는 일은 없었다. 하긴 같은 한국에 살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내와 달리 나는 자주 장모님께 국제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형식적인 인사치레였지만 그 형식마저도 생략할 수는 없었다.
만일 나와 아내가 이민을 가지 않고 한국에 살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다른 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집안의 며느리들과 어머니와의 관계를 보면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빚었던 갈등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수도 있지만. 고부갈등의 양상이나 폐해는 우리 사회의 보편화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굳이 장황하게 설명을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괜히 수많은 아내들의 스트레스 지수만 높이는 일일 테니까.
남편들이 아내들로부터 박해 수준의 학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시댁과의 복잡한 관계 때문이다. 어차피 결혼은 부부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아내의 집안과 남편의 집안의 결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에서도 단연 핵심은 아내와 시어머니와의 관계다. 한국의 어느 집을 막론하고 고부갈등에서 자유로운 집은 없을 것이다.
고부갈등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갈등 중에서도 으뜸일 것이다. 부족이나 국가는 물론이고 인종 간의 갈등보다 복잡하고 치열할 것이다. 원인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근원적 원인 중 하나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자기모순 문제다. 즉, 여자가 남자를 보는 지극히 왜곡된 이중 잣대 문제인 것이다. 잣대란 저울과 같이 누구에게나 믿음을 주어야 잣대로서 기능을 인정받을 수 있다. 아들도 남자고 남편도 남자다. 하지만 생모인 엄마로서 바라보는 자신의 아들과 아내로서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아들은 정 반대의 이미지 속에 갇혀있다.
문제는 아들이 결혼하면 며느리가 생긴다는 점이다. 이때 아들 가정의 중심은 며느리인 아내다. 엄마가 아니다. 하지만 엄마는 기회만 되면 아들의 가정, 즉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로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공권력도 아닌데 말이다.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일을 복사기처럼 반복하려 든다. 자신의 금 쪽 같은 아들이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구박을 당하며 눈칫밥이나 먹고살지는 않나 노심초사다. 혹시라도 그런 현장을 목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오른다. 며느리가 자신의 아들을, 자신이 남편에게 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도 말이다. 어머니와 아내 아들의 삼각관계를 잠시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하지만 이 두 여인들은 그럴 의사가 처음부터 없다.
브런치에 올라온 아내들의 이혼 이야기들을 읽으며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남편들은 한마디로 인간 이하의 (개)쓰레기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심각한 모순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했던 점은 단 하나였다. 쓰레기만도 못하게 묘사된 그 남편들에게는 정말 한마디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녀는 왜 하필이면 그 불량품 쓰레기를 골라 사랑하고 결혼까지 했던 것일까. 그렇게도 남자 보는 안목이 없었던 것일까. 웬만하면 수리해서 사용했을 텐데 오죽하면 버렸을까 싶다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아내 입장에서의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도 버림을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부부의 문제는 부부만 알기 때문에 다만 짐작이나 상상에 맡겨볼 뿐이다.
같은 남자이자 남편으로서 이들의 관점에서 이혼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들의 심각하고 중대한 과오나 부정을 옹호하거나 정당화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혼 전후의 과정에서 느낀 감정들을 아내의 남편이자 가장 그리고 남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왜 남편들이 그녀들의 묘사대로 어처구니없게도 인간쓰레기로 전락하는지 말이다. 아니면 정말 처음부터 인간쓰레기였을까. 그렇다면 시어머니들처럼 아내들도 결국은 인간쓰레기를 낳아서 애지중지 길러왔단 말인가. 정말 알 수가 없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모르는 일 투성이일까.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 빠꾸기들도 그 알들이 다른 뻐꾸기의 알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어머니는 할머니와 고부갈등으로 끔찍하게도 고생하셨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다섯이나 되는 아들들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본인이 시어머니가 되면 절대 할머니처럼 며느리들에게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겠다고. 할머니와 다투고 집을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제는 할머니와의 고부 갈등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남편,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고부갈등이 생길 때마다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유교사상에 절어 있는 아버지에게는 며느리인 어머니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듯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때로는 장독대를 부수며 무력시위를 했다. 할머니에게는 꼼짝도 못 하면서 어머니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서울의 이모집으로 피난을 갔고 우리 육 남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어려서 가장 큰 공포는 귀신이나 도깨비 심지어 죽음도 아니었다. 바로 어머니가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가는 어머니의 부재였다.
그런 야만의 세월은 어머니에게는 달팽이가 기어가듯 흘렀지만 할머니에게는 쏜살같이 흘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후로 어머니에도 며느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상견례나 결혼식장에서 사돈어른들에게 맹세하듯 다짐하곤 하셨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집안에서만큼은 고부갈등이란 악습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신여성처럼 멋져 보였다. 존경스러웠다. 과거 시어머니와 같이 살았던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부당하게 당하는 스트레스는 며느리들의 수명까지도 단축시킬 정도로 극심해 보였다. 그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딘 어머니였지만 화병이라고 당신이 말씀하시던 그 스트레스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물론 할머니로부터의 스트레스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고지식하고 가부장적 사회의 전형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도 컸다. 또 다른 스트레스는 바로 자신의 다섯이나 되는 며느리들과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였다.
아들들의 결혼 전과는 달리 어머니는 며느리들의 많은 것들이 못마땅해서 늘 혀를 차며 사셨다. 돈을 아껴 쓰고 살림을 잘하는 둘째 며느리에게는 자린고비라고 흉을 보셨다. 그 반대로 가족 친지들에게 잘하고 돈도 펑펑 잘 쓰는 큰 며느리에게는 돈 무서운 줄 모른다고 흉을 보셨다. 말을 안 하면 말이 없다고, 말이 많으면 말이 많다고 흉을 보셨다. 특히 명절 때면 며느리들에게 어머니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할머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 보였다. 거실에서 빈둥거리며 TV를 보며 술을 마시는 자신의 아들들에게는 잔소리는커녕 대접이 극진했다. 가끔 나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오신 것은 아닌지 하고 어머니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할머니처럼 어머니의 세월도 흘러갔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로부터 고통받던 며느리들이 다시 시어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벌써 조카들이 결혼을 했으니 말이다. 나의 아이도 이제 성인이 되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아내도 영국에서 며느리를 맞이할 것이다. 물론 영국에서 고부갈등은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혹시라도 아이가 한국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들이면 상황이 재현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내 또한 항상 깨어있고 현명한 사람이기에 어머니처럼 마음속으로 여러 번 맹세를 했을지도 모른다.
고부갈등 제로인 유토피아 사회를 꿈꾸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나의 아내도 아들의 아내를 친구나 딸 같은 존재로 대할 것이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짐이나 맹세는 할머니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을 확률이 높다. 고부갈등은 나의 대에서 끝이라고. 며느리들도 자신의 친딸처럼 귀한 딸들이었다고. 아이가 흑인이나 인도 또는 백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하면 말릴 수야 없지만 문화의 갭에서 오는 갈등으로 인해 아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혼자 끙끙 앓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르는 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고 그 일상이 모여 인생이란 환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량윈다오가 쓴 "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랑의 노래는 연인을 위해 부르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해 부르는 것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관계가 가능한가.(PS: 본 내용은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된 글이며, 이혼을 아내가 아닌 남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