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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ul 31. 2019

여보, 나 1년만 쉴까? #7 질병이 준 선물

일과 질병이란 일상에서 해방되어 휴식과 치유 및 힐링에 관한 연재이다.


지난해 가을이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전날 출발한 영국항공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이른 아침에 사뿐히 내렸다. 착륙 전, 한국의 서해 바다와 섬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한국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계류장으로 들어오는 그 짧은 시간에 한국에서의 1년의 휴식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막연하고 불안한 계획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날 히드로 공항에서 배웅하던 아내와 아들이 생각났다. 1년 동안 볼 수 없다는 사실보다도 더 힘들었던 것은 무너져 내리는 몸과 마음을 과연 내가 이겨내고 치료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였다. 어쩌면 전날 공항에서의 이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만큼 나의 상태는 심각하고 위태로웠다. 매일 죽음이라는 극단을 생각하는 우울증 환자에게는 내일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든 사고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 찰나만 넘기면 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내가 1년간의 휴식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누가 들으면 참 팔자 좋은 소리라고 비웃을 것이다. 1년간이나 쉬면서 쉴 수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하는 나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살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을의 햇살이 나를 반겨주었다. 한국의 가을 햇살은 생각보다 묵직하고 강렬하였다. 아직도 여름의 강렬한 여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를 반겨주거나 픽업해주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공항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친구가 차를 가지고 나와서 기다렸다가 픽업을 해주곤 하였는데 이번에는 월요일 아침이라 회의가 있어서 나오지 못하였다. 커다란 이민가방 두 개와 작은 배낭 하나 그리고 기내용 케리어까지 이삿짐을 방불케 하는 짐을 가지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친구가 알려준 대로 의정부행 리무진 버스표를 샀다. 10여 분 후에 리무진이 도착하자 짐칸에 짐들을 밀어 넣고 좌석에 앉아서 설레는 마음으로 여기저기에 카톡 메시지를 날렸다. 잠시 후 리무진은 출발하였다. 거침없이 달리는 리무진은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의 터널들을 통과하며 의정부 근처의 별내라는 곳에 정차하였다.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리무진의 짐칸에 있는 짐들은 친구의 차로 옮겨졌고 우리는 근처 청학리의 순댓국집으로 향하여 브런치를 먹었다. 물론 소주도 한잔 곁들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대화는 끝날 줄 모르고 오후까지 이어졌다.


친구는 나의 얼굴을 보더니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몰골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기웃거릴 만큼이나 심각하였다. 그렇게 친구들의 보살핌으로 한국의 가을을 느끼며 치료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진전이 없자 1차 위기가 왔다. 연말연시에 닥친 위기는 나를 녹다운 상태로 몰고 가기도 하였다. 그 위기들을 해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옆에 있던 여동생의 힘이 컸다. 여동생은 돌아가신 어머니 이상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고비를 넘기고 나서 해가 바뀌었고 새해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나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질병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운 좋게도 집어 든 책이 니체였다. 니체를 통해 나는 새롭게 태어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하였다. 질병은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내용은 질병을 통해 습관과 단절되고 질병이 우선순위를 바꿔준다는 것이다. 또한 질병을 통해 생명을 발견하고 질병 비관주의를 극복하는 방법과 질병은 자기 인식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은 질병과 나누는 대화라는 것이다. 

질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망언 같은 소리가 결국 나를 살려주었다. 니체 또한 말년에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였지만 인생의 대작들을 집필하였다. 질병과 건강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호 보완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질병과 싸우면서 몇 개월 후 나는 매주 한 권씩 책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질병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글들이 작지만 큰 희망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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