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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04. 2019

테오도라 #6 잃어버린 유리 구두

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마지막 만남

     

지난해 초에 한국에 잠깐 왔을 때 테오도라를 신림동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벌써 1년도 넘었다. 내가 잠깐 한국에 나왔다가 영국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만남이었다. 일식집에서 생선구이 정식을 사주어서 얻어먹었다. 그게 같이 나누었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숍은 이층으로 된 구조였다. 이층에는 커다란 통 유리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햇살 아래에 그녀와의 오랜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표정에서부터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말투나 자세에서 전혀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인생의 선배나 오빠로서가 아니라 같은 우울증 환자로서의 충고였다. 일단 자신감 회복이 중요하였다. 책도 많이 읽고 좋은 남자도 많이 만나라고 충고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 충고를 했던 기억이 나는 이유는 나도 같은 아픔을 겪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오래 살다 보면 심한 고립감을 느끼는 시기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 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가족도 이웃도 직장동료나 친구도 타인이 되는 그 시점에 느끼는 외로움은 견디기 쉽지 않다.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많이 기르게 된다. 반려동물은 가족 이상의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된다. 자기를 반겨주고 좋아해 주는 대상이 반드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은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측면이 있어서 씁쓸하다.

     

외로움과 그로 인한 고독감을 이겨내려면 활발한 사회생활이나 여가활동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고양이가 둘째 아들 노릇을 톡톡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영국의 집에 있는 우리 단오를 둘째 아들로 생각하고 대우해 준다. 단오야 물론 나를 아빠가 아니라 집사쯤으로 대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서 상관없다. 테오도라가 죽음으로 발견된 시점이 바로 5월 초였다. 그 5월 5일이 바로 단오 생일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단오가 된 것이다.

     

지난해 초 겨울 신림역 8번 출구에서 만난 테오도라는 나를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나는 한국의 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동생하고 만나면 한국에 관한 많은 것들을 묻곤 하였다. 친구들과의 대화와는 다른 그런 대화들은 재미도 있었고 옛날 추억을 되새기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동생도 나와의 대화에서 활력을 찾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고 하였다.

     

일식집에서는 정확히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꽁치구이 생선을 바르다가 절반만 먹고 포기하였던 기억과 식당 안에 푸른 식물이 많았다는 것밖에는 기억이 없다. 심지어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15개월이라는 간극은 적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커피숍에서는 테오도라가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는 점이고 그 이야기들이 어렴풋하지만 기억이 난다는 점이다.

     

그 기억들은 이제 무채색을 띠며 점점 흐릿해져 가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테오도라의 죽음의 단서와도 별로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테오도라의 모습보다는 그녀가 말한 언어들이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녀는 갔지만, 그녀의 몸은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들은 그 몇 마디의 말들이었다. 그 말들의 의미가 이제 나에게는 테오도 라인 것이다. 영정사진을 아무리 봐도 낯설기만 하다. 가장 확실한 이미지인 사진이 이미지로서 역할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다.

     

그녀가 내 앞에서 내뱉은 언어들이 그리워진다. 아무도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세상을 한탄하며 원망하던 그녀였다. 심지어 가족들과의 불화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라를 테오도라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나밖에는 없었다. 나를 나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세상에는 없다. 그래서 테오도라 너는 오빠보다 덜 힘들고 덜 슬픈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만도 못한 것이다. 이제는 부디 원망과 분노를 내려놓기 바란다.

     

커피숍 2층의 햇살

     

꽁치 가시만이 생각나는 생선구이 정식을 먹고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역 주변에 커피숍이 많아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다. 나는 햇살이 드는 커피숍을 선택하였다. 1월 초였는데도 한겨울의 유리를 통과한 햇살은 충분히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이층의 창가에 앉아서 기다렸던 기억으로 봐서 커피도 테오도라가 사주었을 확률이 아주 높다. 나는 아메리카노 라지를 주문하였다. 물론 따뜻한 커피였다.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커피 두 잔이 든 쟁반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웃음이 많았던 이십 대의 그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십 대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그녀는 이미 두 어깨가 많이 처져 있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그녀 앞에서 내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 시점도 바로 테오도라의 나이 때부터였다.

     

나는 가볍고 평범한 언어들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테오도라는 자연스럽게 듣거나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내 눈보다는 커피 잔을 응시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니면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살이 제법 좋은 날이어서 테이블 중간까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 그 빛을 자주 응시하며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커피는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나이는 들어가고 피부는 세월을 그대로 반영하는데 언제까지 혼자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젊고 예쁘고 거기에 돈도 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다는 푸념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푸념은 내가 이민 가기 전에도 들었다. 그때는 두 가지뿐이었다. 이십 대의 젊음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십 년이 지난 2018년 1월 초의 그녀는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비장의 무기를 세월 앞에 잃어버린 그녀는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테오도라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넘나들어도 그 종착역은 항상 현실인 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테이블 중반까지 밀고 들어왔던 겨울 햇살은 그새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나도 그녀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근무가 있었고 나도 저녁 약속이 있었다.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괴롭히거나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남자에 대한 눈높이 또한 그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백마 탄 왕자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유리 구두를 잃어버린 신데렐라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그녀에게는 비극이었다.

     

이러한 비극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렀고 흐르고 있고 흐를 것이다. 시간에 순응하면서 현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면 세상은 가벼워지고 편해진다. 아무리 여자라는 특수성이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사람은 각자의 나이에 맞는 얼굴이 있고 또 그 얼굴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이도 피부도 돈도 걱정하고 욕심을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낸 것이 현재의 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출근시간이 촉박해져서 늦을까 봐 택시를 탔다. 나는 다시 신림역 8번 출구로 돌아왔다.

     


외로움과 우울

     

택시를 타고 급히 병원으로 야간 근무를 위해 출근하는 테오도라는 힘겨워 보였다. 삶 자체가 무겁고 버거워 보였다. 어느 것 하나 내려 좋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비단 그녀만 힘들어하는 삶이 아니었다.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 시점에서 나는 삶을 좀 정리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정리는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는 것이었다. 생각도 단순화시키고 죽음도 단순화시켰다. 심지어 옷들도 입지 않는 것들은 모두 버렸다. 관계의 설정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도 가족과 친지들도 그 관계 설정을 다시 하였다. 그렇게 단순화시키고 나니 마음은 좀 가벼워졌다. 홀가분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단순화시킬 수 없는 것 하나가 남아있었다. 바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이었다. 이 감정을 단순화시키면 우울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작아지거나 단순화되지 않았다. 붙잡고 늘어져도 내버려 두어도 힘들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를 이미 겪은 나로서는 테오도라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마땅한 충고가 없었다. 외로움 하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우울도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시기의 후기 청년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참으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현실보다는 비현실의 세계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현실의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이미 저버린 꽃처럼 느껴진다. 내년에 다시 그 꽃이 핀다는 희망도 보장도 없이 그렇게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 나락이 바로 에베레스트의 크레바스 같은 곳이다. 한번 빠지면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퇴로가 막힌 후기 청년들은 우울하지만 어떻게든 삶도 영위하고 비상구도 찾아야 한다. 한 가지도 쉽지 않은데 이 두 가지를 해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상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비상구는 존재한다. 누가 찾아줄 수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힘들 때 토닥여주고 외로울 때 위로의 한마디를 해줄 수 있는 그런 나만의 비상구는 바로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는 그 비상구를 찾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결국은 찾아내었다. 그래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인생의 길이나 방법은 기존의 그것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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