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겪은 1인 가족 고독사의 사회문제를 연재하다
황금연휴와 함께 시작된 5월 첫 번째 주말은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였다. 조카들 중 첫 번째 결혼식이 있던 토요일에 들려온 비보는 모두를 절망케 하고도 남았다. 그 절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와 같았다. 한 사람의 죽음은 모든 가족과 친지들을 절망에 빠트리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의 방식과 알려지는 과정이 죽음 자체가 주는 의미보다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여동생이 사망 후 100일 만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일반 죽음보다 몇 배의 절망을 가족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절망을 느끼고 접하였다. 하지만 이번 절망은 지금까지의 모든 절망을 합한 무게보다 크고 깊이보다 깊게 나의 심장을 강타하였다.
계절의 여왕답게 한국의 5월은 화려하고 찬란하였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생동감을 발산하느라 바빴다. 지천에 아카시아와 철쭉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장미들도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대지는 연초록에 점점 덧칠을 해가며 햇살은 여름을 방불케 하였다. 그 햇살은 아카시아 꽃에서 금방이라도 꿀을 짜낼 듯 따가웠다. 향기는 발효주를 빚을 때 나는 것보다 강하게 농익어가고 있었다. 아카시아 꽃이 이렇게 진한 향을 배출하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꽃들을 따먹었다. 그중 가장 맛이 있던 꽃이 바로 아카시아였다. 그 안에 꿀이 들어있어서 달았다. 진달래도 따먹었는데 맛보다는 진달래꽃 특유의 색깔이 예뻐서였다. 맛도 없지는 않았다. 미세먼지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5월 초에 날아든 여동생의 비보는 아카시아 꽃의 향기를 더욱 강하게 발산시키고 있었다. 아카시아는 내가 사는 집 주변에도 화장터나 추모공원에도 있었다. 봉사를 다니는 장애인 주거시설 인근의 야산에도 흐드러지게 피어서 향을 전해왔다. 아카시아 꽃은 이미 익숙한 꽃이지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간직하지는 않았었다. 테오도라의 죽음과도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하얗게 핀 아카시아만 보면 그녀가 떠올랐다. 그 진한 향이 느껴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카시아는 그녀와 동일시되어 가고 있었다.
북미가 원산지인 콩과 식물의 아카시아를 여동생이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도 좋아했던 꽃이 아니었듯이 여동생도 좋아했던 꽃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월 둘째 주 화요일 오후에 여동생을 벽제의 어느 추모공원에 안치하였다. 전철을 갈아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경의선이라는 전철 안에서의 1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길고 길었다.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억울함과 미안함이라는 단어를 부여잡고 생각의 꼬리를 이어갔다. 그 추상적인 단어들과 씨름해도 머리만 복잡해지고 생각은 얽히기만 할 뿐이었다. 평소에 생각들로 고통을 받던 나였다. 그런데 그 쉬운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철의 일부 구간은 지하였고 일부 구간은 지상이었다는 생각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숨도 쉬지 못한 채 죽어버린 1시간을 전철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려야 할 도농역뿐이었다. 몇 정거장 전부터 내려야 할 역이라도 생각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시 잠깐 멈추었던 1시간을 살리려 노력하였다. 다행히 도농역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먹은 음식이라고는 낮에 화장장 7호실 방에서 먹었던 김밥 한 줄이 전부였다. 오 년 전에 어머니가 화장되는 시간에도 점심을 먹으러 구내식당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내가 음식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상황에서도 가족들은 식사를 하였다. 시공간을 막론하고 한 끼의 식사는 산자의 몫이었고 산자의 신성한 의무였다.
집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가끔 들르는 콩나물 국밥집에 들어갔다. 굴이 들어간 콩나물국밥을 시켰다. 평소에 자주 와서 먹던 단골집이다. 나의 입맛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혀가 기억하고 있는 그 맛이었다. 아니 더 맛있었다. 배가 고파서였는지 순식간에 그 뜨거운 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 있었다. 먹고 나니 배가 부르고 피곤이 몰려왔다. 국밥집을 나서며 그 배부른 만큼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물론 그 죄책감은 떠난 자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을 그 뜨거운 국밥이 대신하고 있었다.
국밥집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습관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늘 다니던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고속도로가의 펜스가 있는 산책로를 향하고 있었다. 구리 판교 간 고속도가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높다란 방음벽 펜스가 쳐져 있다. 그 펜스와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유수지 역할을 하는 물이 항상 말라 있는 골짜기가 있다. 그 산책로의 골짜기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아카시아는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 홍수조절을 위해 많이 심어졌다.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아침에 나오며 느꼈던 아카시아 향기가 다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어서 꽃은 희미하게 윤곽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희미해도 아직은 싱싱한 포도송이 모습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카시아의 향기만큼은 희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꽃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 느껴지는 향기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 향기를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전철 속에서 멈춰버린 두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두 단어는 억울함과 미안함이라는 단어다. 100일 동안이나 무단결근을 해야만 했고 그 결과 해고된 그녀의 억울함이었다. 100일 동안이나 연락 한번 해보지 않은 오빠의 무성의함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은 그다음이었다. 나의 무성의함은 계속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도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고립된 무인도에서 탈출하려 노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변명하고 있었다.
가족 중에는 그래도 나라는 인간을 오빠라고 의지하던 그녀였다. 친오빠가 아닌 사촌이어서 더 편하게 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앞에서 곧잘 속내를 털어놓고 울기도 하였다. 힘들다고 하소연도 하였지만 이 무정한 오빠는 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다며 그녀를 외면하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뻔뻔하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인 나라는 사람이 오빠랍시고 그녀를 위하는 척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는 척하였다. 그녀는 나의 이러한 비겁하고 형식적인 가식도 모르고 오빠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더욱 억울해할 것이다. 나의 미안함은 그녀의 억울함과 정비례 관계의 함수관계가 성립되고 있었다.
그녀의 장례식장은 조서를 작성한 동작경찰서에서 가까웠다. 경찰서에서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은 작은 병원의 허름하고 오래된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이었다. 그 이유는 건물의 4층에서 악취가 난다는 주민의 신고로 경찰과 119 대원 및 장의사가 출동해서 시신을 수습해왔기 때문이었다. 경찰서가 소재한 관내의 장례식장의 장의사가 시신을 수습해서 영안실에 안치한 것이다. 사망자 신원확인 절차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지문 채취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서에 먼저 들러 지루하고 복잡한 사망자 확인 진술조서를 작성한 다음에야 장례식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지하에 위치한 장례식장은 미로처럼 복잡하였다. 그나마 규모가 작아서 헤매지는 않았다. 아니 헤맬 필요가 없었다. 빈소를 차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금연휴와 겹치면서 부검 일자가 늦어진 것도 이유였지만 자신의 혈육을 남기지 못한 것도 그 사유에 해당되었다.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장례식장 관리실에 들어갔다. 저녁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장례식장은 음산하고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빈소를 차릴 수 있는 대여섯 개의 방은 모두 비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썰렁하였다. 관리사무소에는 사무용 책상과 회전의자가 있었고 작은 의자들 몇 개가 소파를 대신하고 있었다. 수의와 모형 관들이 있는 전시장 앞에는 간이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침대에서 파자마 차림의 직원이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그리고 전화를 하자 장의사가 나타났다. 장의사는 먼저 애도를 표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다소 의례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정중함을 잃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장례절차에 대한 협의가 시작되었다.
협의 시간 내내 나의 눈길은 모형 관들과 수의가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으로 향하였다. 관은 매장용과 화장용으로 나뉘었고 매장용은 화장용에 비해 상당히 비쌌다. 재질은 오동나무였다. 수의는 삼십구만 원부터 삼백만 원까지 대략 여섯 종류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비싼 삼백만 원짜리는 그 유명한 안동포였다. 수작업으로 제작된 삼베옷이었다. 테오도라가 입을 수의는 2호 여자용 분홍색 수의였다. 중국산으로 면 56.1%, 폴리 33%, 아크릴 10.9%의 성분으로 제작되었다. 가장 저렴한 화장용 수의였다. 죽어서 입고 갈 옷은 본인이 결정하지 못하였다. 정작 본인의 옷장에는 좋은 옷들과 가방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가방은 대부분 명품들이었다. 이 옷들과 가방들은 모두 청소업체에서 처리해 주기로 하였다.
저가의 중국산 수의는 엷은 분홍색으로 기계로 직조된 성긴 삼배 형태였다. 한눈에도 고가의 안동포 수의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어 보였다. 군대의 사물함에 각 잡힌 군복처럼 절 접혀서 전시되어 있었다. 장례 절차를 이야기하는 장의사는 물건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처럼 보였다. 아니 세일즈맨이 맞았다. 오동나무 관과 수의를 보면서 나는 비로소 여동생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장의사가 지정해준 분홍색 수의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였다. 여동생이 입고 갈 옷은 좀 더 예쁘고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였다. 거기에 꽃이라도 한 다발 넣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역시 부질없었다. 그렇게 분홍색은 한동안 나의 뇌리를 떠날 줄 몰랐다. 어차피 화장하면 타서 사라질 옷과 관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 본질은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리고 집행하는 의식이 진행되어야만 하는 한 분홍색 수의는 여동생에게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비록 중국산의 저가 용품이지만 여동생의 죽음을 온 가족이 실감할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도구였다.
늦은 밤 이어서였는지 몰라도 장의사와 유족 간의 장례 절차 협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소 어눌한 말투의 장의사는 표정연기의 달인처럼 보였다. 약간은 육중하리만큼 큰 체구에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말이 협의였지 거의 일방적이었다. 그의 의도에 따라 장례절차가 설명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이러한 낯선 시신”이라는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였다. 그 “낯선 “이라는 단어의 의미에는 시신 수습 과정에서의 자기들의 노고를 스스로 치하하고 있었다. 눈뜨고는 볼 수 없다는 표현과 더불어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 견적서에 더해지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동안 맞이한 다양한 형태의 죽음에 대해 무용담처럼 부연설명을 해주는 친절함도 잊지 않았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때로는 가족들의 슬픔을 애도할 줄도 알았다. 나아가서 공감능력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직업으로서의 장의사가 하는 업무를 기계처럼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잘 프로그래밍된 AI 같아 보였다. 관도 수의도 모두 그가 결정하였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비용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가격표가 식당의 메뉴판처럼 일목 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협의가 아니라 장례식 견적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총견적은 삼백만 원을 넘지 않았다. 거기에는 서초에서 화장 후 벽제에 안치하는 버스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화장비용은 서울시민이어서 12만 원으로 아주 저렴하였다.
장의사는 이러한 협의를 하루에도 몇 건씩 진행할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직업을 과연 귀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온전한 형태의 시신도 처리하는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별의별 사고로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해 들어오는 시신을 처리하는 직업을 선택하는데 과연 그들은 자부심이 있을까라는 또 다른 의문이 찾아왔다. 직업이란 먹고살기 위해 택해야만 하는 고귀한 것이다. 물론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귀천이 없을 수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직업을 택해야만 하는 장의사라는 직업의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 직업을 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장의사란 직업은 세상의 수많은 직업 중 피하고 싶은 직업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여동생의 시신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다. 부패와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차마 보여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전적으로 장의사의 생각이었지만 대체로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큰 오빠만 직접 보자고 하였지만 장의사의 만류로 포기하고 말았다. 죽어서도 얼굴조차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기는 애당초 불가능해 보였다.
최초 시신의 발견부터 수습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수차례 “이러한 낯선 시신”이라는 용어를 반복 사용하였다. 약간은 의도성이 엿보여서 불쾌하기도 하였지만 그가 없는 사실을 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힘들고 고단한 직업을 동정하고 있었다. 죽음에 아무리 익숙해진다고 한들 어찌 멋지고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순간이었지만 죽어서 영안실에 안치된 여동생보다 장의사를 더 동정하고 있었다.
장의사는 장례지도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장례식장에서만 근무하는 것은 아니다. 화장장에도 추모공원에도 그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매일 그들은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죽은 시신을 마주하는 사람과 그 시신을 화장 후 유골을 분쇄해 납골 항아리에 넣는 사람 그리고 추모공원에서 납골 항아리를 안치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사람들이다. 어려서 꿈이 뭐냐고 물으면 장의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