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키치죠지 소품샵 ‘Paper message’에서
2024년 무더운 여름이 사그라져 가는 10월 초 어느 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도쿄 키치죠지에 왔다. 키치죠지 근처에서 일하는 처제 덕분에 이 동네를 처음 알게 되었다.
조용한 골목길이 이어지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있어 산책하기 좋은 동네다. 그 골목을 걷다 보니 갑자기 그해 여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키치죠지의 어느 카페 입구에서 막내아이가 넘어져 하얀 손수건이 붉게 물들 정도로 이마에 피를 흘리던 모습, 아이를 급히 안고 동네 의원으로 달려갔을 때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현지인들의 얼굴, 그리고 이곳에서 막내아이는 이마를 꿰매는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는 보호자 한 명만 남으라 했고, 나는 두 아이와 함께 네 시간 동안 키치죠지 곳곳을 배회했다
그때 만난 곳이 아기자기한 소품샵 ‘paper message’였다. 마침 그날이 아내 생일이라 아이들과 함께 축하엽서를 고르고 짧은 메시지를 적었다. (페이퍼 메시지란 이름처럼 아이들은 종이에 연필로 또박또박 엄마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썼다.)
그곳에서 처음 보게 된 것이 2025년 작은 달력이었다. 나는 그 달력을 사서 지난 1년 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일터 책상 위에서, 입원한 병실에서, 그리고 다시 집 침대 위에서 그 달력은 늘 곁에 있었다.
때로는 들뜬 희망의 마음으로, 때로는 버티는 마음으로, 또 어떤 날은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작은 뿌듯함으로 하루하루 한 장의 달력을 뜯었다.
이번 여행에서 다시 키치죠지를 찾은 이유 중 하나도
사실은 이 달력이었다. 마지막 날, 번갯불에 콩 볶듯 동네에서 밥을 먹고, 소품샵에 들러 달력을 사고, 급히 공항으로 향했다. 분주한 마음 탓에 동네의 정취를 오래 느끼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다.
2026년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청록과 분홍 말이 묘하게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스마트폰 캘린더로는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 달력의 감성.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난 1월과 2월의 하루를 뜯었다.
이 달력은 내게 시간의 촉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의 하루가 나에게 주어졌다. 이 하루를 잘 살아내자고 조용히 다짐해 본다.
하루하루를 주어진 소중한 날로 받아들이며, 시간의 감각, 시간의 촉감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이 달력을 다 뜯고 난 뒤. 내년에 이곳에서 다시 나를 만날 때 조금 더 성숙해진 나, 조금 더 너그러워진 나, 조금 더 삶을 품을 수 있는 내가 되어 있기를 바라며.
넉넉한 가을과 겨울의 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