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일
둘레길에서 다시 만난 즐거움과 감사 (무농)
2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각별하게 이어 온 인연들과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겨우내 얼어 있던 공기가 풀리듯 우리 마음도 서서히 녹아내리는 날이었다. 유난히 화사한 햇살 덕분인지 발걸음은 가벼웠고, 대화는 자연스레 깊어졌다. 정상을 향해 숨을 몰아쉬기보다 둘레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길을 택한 것은, 이제 우리의 나이와 형편에 더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이 인연은 현역 시절, 전문가 과정 교육에서 시작되었다. 서로 다른 직장에서 모였지만 ‘교육’이라는 공통의 주제는 우리를 직함이 아닌 한 사람으로 만나게 했다. 그때 나누었던 생각과 토론, 낯섦 속에서 피어났던 공감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경험은 삶의 굴곡마다 나를 붙들어 준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의 만남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 다시 확인하는 우정의 자리였다.
이제 우리는 예전처럼 건장함을 과시하거나 호기를 부릴 나이가 아니다. 대신 어디가 아프고 무엇이 고장 났는지를 경쟁하듯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 말들 속에는 푸념보다 자부심이 더 많다. 치열하게 살아온 세월이 남긴 흔적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연은 다르지만, 그 바탕에는 가족을 돌보고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해 온 마음이 흐르고 있다.
누군가는 서울시 건강 프로그램인 '손목닥터 9988'로 걸음 수를 채워 모은 포인트로 오늘 점심을 기꺼이 샀다. 손주를 돌보느라 외출이 쉽지 않다던 이는 불러줘서 고맙다며 환하게 웃었다. 또 다른 이는 추운 겨울을 피해 태국에서 한 달을 보내고 왔다며 새로운 노후의 풍경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원은 거창한 말보다 그런 경청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흔히 수다는 여성의 몫이라 하지만, 은퇴한 남성들의 대화도 결코 짧지 않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말할 시간이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책임과 역할에 눌려 미뤄 두었던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흘러나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말할 사람이 있고, 또 그 말을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포근한 날씨 속에서 걷고, 건강한 점심과 약주를 나누며 우리는 밀린 숙제처럼 쌓여 있던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래서 더욱 귀했다. 함께 걸을 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소박한 사실이 오늘을 충분히 행복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