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나비 May 17. 2022

네가 귀여운 이유

살기 위해 귀여운 아이들

대학교 때, 교육심리학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어린 아이가 얼굴이 크고 귀엽고 몸이 얼굴에 비해 작은 이유는, 그런 모습을 인간이 귀엽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인형을 만들 때도 보통은 얼굴이 크고 몸통은 작게 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귀여워야 아이들이 비로소 보호를 받기 때문이라고도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교육학과 대학생들은, 다시 말하면 미래의 꿈을 '교육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지금의 하루하루를 헌신하는, 꿈과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한 대학생들은 아이들이 귀여움을 받는 이유가 겨우 그것이냐며 교수님의 말씀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다. 물론 소리 내어서 '저는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우' '아아' '으허' 등의 추임새로 동의하지 않음을 한껏 드러내었다.

 

그런 반응에 교수님은 웃으시면서, 내 말이 맞다고. 마치 두고 보라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수업을 들은 날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계속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솔직히 지금 그때 배운 교육에 필요한 지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아이들이 살기 위해 '귀여움'을 선택했다는 그 말만은 기억에 남고, 그럴만하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오늘 아침에도 아이와 나는 전쟁을 벌였다.


언제나처럼 환한 웃음으로 깨어난 아이는 나를 보고 '엄마 보고 싶어'라는 말을 했고, 나를 보며 웃었고, 내가 다리와 팔을 만져주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비틀었다. 이때까지는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꿈에 누가 나왔냐는 말에 엄마가 나왔다고 말하며 웃을 때까지는.


알레르기 비염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기침을 하는 아이라서 일부러 좀 늦게 깨웠는데, 아이는 내맘도 모르고 늑장에 늑장을 부렸다. 구워준 빵을 아주 천천히 먹었고 약과까지 달라고 하면서 생떼를 썼다. 멀쩡한 바지를 벗고 쉬야를 하라고 했더니 안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원래는 아이가 스스로 옷을 입게 해야 한다는데. 등원까지 5분 남은 시점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옷을 입히고 가방을 들고 아이를 차에 태웠을 때에야 아이를 전혀 씻기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어쩔 수 없어. 원에 가서 씻겠지.' 나는 차를 출발시켰고 트럭과 버스들이 양옆과 앞까지 포진한 상황에서 조심조심 최선을 다했다. 아이는 아이의 등원 때문에 운전을 배운 자가 초보 중의 초보로 진땀을 흘리는 것도 모르고 손에 든 약과가 없어졌다느니 하는 팔자 좋은 소리나 해댔다.


원에 간 아이는 또 다른 사람이 된 듯이 얌전해졌다. 선생님 앞에서는 세상 착한 아이처럼 웃으면서 엄마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씩씩대며 집에 돌아오고 나서 다시 하루를 돌아보았다. 문득 아이가 아침에 짓던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잠에서 깰락 말락할 때의 그 웃음. 햇살 같은 다정함. 그리고 몸보다 얼굴이 큰 비율. 네가 가진 귀여움.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극강의 귀여움이 아니었다면 오늘 하루 또 실랑이를 하며 아이를 등원시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20년 전의 교수님 말씀이 진짜로 맞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 말이 맞다기 보다는, 그 말은 도저히 이런 존재를 사랑하고 위해주고 존중할 수 없을 것 같은 엄마들의 마음을 '귀여움'이라는 설명으로 대변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 귀여워서라도 내가 져주는 거지. 귀여우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아마도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육아의 고됨이 그 말에 녹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교수님은 이미 경험하셨으니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만, 풋풋한 대학생들은 당시만 해도 엄마들은 아이만 낳으면 모성애가 퐁퐁 솟아나오는 줄 알았으니 그 말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