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다섯 살이 된 아이는, 뭐든지 보고 싶어한다. 밥을 먹을 때 끓고 있는 찌개 냄비 속도 보고 싶어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복도 창밖의 풍경도 보고 싶어한다. 문제는 그것들이 다 키가 커야 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팔힘도 약한 내가 15키로에 육박하는 아이를 들고 있다 보면 어느새인가 팔이 저리면서 부들부들 떨려온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보고 싶다고 하니까.
아이는 가끔 나도 보고 싶다고 한다. 밥을 먹다가 굉장히 뜬금없이, 나를 보고 '엄마 보고 싶어'라고 말을 한다. 도대체 이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 있잖아.'라고 말을 하면 또 '엄마 보고 싶어'라고 말을 한다. 그 말의 비밀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언제인가 아이의 사촌 누나네 놀러 갔다가 집에 가자고 하니까 아이가 '00 누나 보고 싶어'라고 말을 했던 것이었다. 아마 '보고 싶다'는 말은 진짜 '보고 싶다'는 뜻도 되지만, '좋아한다'거나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라는 뜻을 포함하기도 하는 것 같다.
'보고 싶다'는 말은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랄 때 쓰는 말이다. (물론 아이는 늘 그렇게 쓰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보고 싶다'는 말을 쓰는 아이들은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없지만 무언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고,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나은 상황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어쩌면 사람의 삶은 그런 상상력 때문에 조금 더 살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요즘 <사내맞선>을 보면서 현실에는 없는 재벌 남자에 빠진 것처럼. 팍팍한 현실을 그런 상상력들이 윤택하게 만들어주기 마련이니까.
늘 '보고 싶은' 아이는, 이제 서서히 자신의 삶을 주도해 나가며 바람과 꿈들로 스스로 삶을 가꾸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진단명보다, '보고 싶다'는 말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아이를 평가하는 어느 검사도 '아이가 보고 싶어하나요?'를 묻진 않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꿈 많은 어린 왕자도 '상자 속의 양'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나.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아이와 여느 때와 같이 잠을 자기 위해 누웠을 때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나는 요즘 아이의 발달에 대해 머리가 터지게 고민 중이었다. 왜 이 아이는 이것을 못할까, 또래 아이들은 다 하는 것을 얘는 왜 하려고 생각도 하지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손바닥처럼 뒤집히는 생각들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요즘, 아이와 자려고 누웠다가 뜻밖의 우스운 일을 겪게 되었다. 아이가 요즘 새로 가기 시작한 어린이집에서 사귄 친구(사귀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두 아이는 인사조차 하지 않으니. 어울려 밥은 먹는 모양이다.)에 대해서 말하면서 뜬금없이 그 친구 아빠가 '보고 싶어'라고 말했다.
도대체 그 친구 아빠와 아이의 접점은 무엇인가. 엄마야 자주 보지만 아이 아빠는 언제 지나가다 한 번 봤나. 아이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아이 아빠가 보고 싶은가. 따지기 전에 웃음부터 나왔다. 내가 깔깔거리면서 웃으니까 아이도 웃는다. 한참을 웃다가 보니 요즘 고민하던 것이 어느새 휘발되어 버렸다.
그래, 아이는 '보고 싶어'하는 아이다. (물론 그 친구 아빠를 보고 싶어하는 건 일반적인 '보고 싶어'는 아닌 듯하지만) 무언가를 보고 싶어하고, 꿈을 꾸고, 상상을 하고. 상상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긴 하지만 아무튼 자기 나름대로는 삶을 윤택하게 가꿔나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구렁텅이에서 고민에 잠겨 있는 동안 아이는 그렇게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