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까지는 모르겠고.
아이를 낳았을 때, 어느 부모도 아이가 '느린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느새 아이에게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투영했다. 그것은 앞서가지는 않아도 뒤쳐지지는 않는 것. 여러 사람 속에서 '튀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는 적어도 돌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랐다. 무언가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해도, 크게 모나거나 뒤쳐지지도 않았다. 뒤쳐진다고 판단하기에도 좀 어린 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의 일생에서 아주 큰 고비. 바로 '걸어야' 하는 과제 앞에서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씩 늦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 입장에서 '걷는다'는 것은 조나단 시걸의 '나는 것' 만큼이나 큰 과제일 것이었다. 아무 것도 잡지 않고 두 발만으로 걸어야 한다니. 몸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고 두 발은 큰 몸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작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15개월이 되도록 걷지 못했다. 영유아 검진 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15개월이 지나서도 두 손을 떼고 걷지 못하면 다시 병원에 오라고. 그 말을 이해하기라도 한듯이 아이는 15개월에 드디어 직립 보행에 성공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아이는 두 돌이 지났다. 그런데 또 문제가 나타났다.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것이었다. 걷는 것에 이어 또 한 차례 큰 과제를 만난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가 처음 '엄마'를 한 것은 6개월 무렵이었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보고 '엄마'를 말했고, 또 언제인지 모를 날에 '아빠'를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언어는 멈추어 버렸다. 시키는 것은 곧잘 하고 단어 카드를 들이대어도 단어를 곧잘 맞추었으나 그것을 말하지는 못했다.
또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나는 수차례 검색을 하고, 유투브 방송을 보고, 맘카페를 뒤졌다. '언어 치료'라는 말이 나왔다. 아, 왠지 '치료'라는 말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치료는 아픈 사람이 받는 거고, 뒤쳐진 사람이 받는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느리고 뒤쳐졌다는 것을. 치료는 그저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는 정도로만 받았으면 좋겠다. 그 이상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던 중 아이가 기적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두 돌이 훨씬 넘어 말이 트인 아이는 하루종일 떠들어 댔다. 그것으로 됐다 싶었다. 뭔지 모를 말을 해도, 어쨌든 말을 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여겼다. 노래도 곧잘 했다. 물론 대부분 뭉개진 발음이라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점차 발음은 좋아졌고 할 수 있는 말도 많아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 돌이 될 무렵, 상담 기간에 어린이집 선생님과 한 상담에서 나는 또 한 차례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사회성이었다. 아무래도 언어가 늦다 보니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 놀아서 조금 걱정이 된다고. 1년 동안 지켜봤지만 보통은 이맘때쯤에는 느리다가도 따라잡는데 그러지 못해서, 발달 검사를 알아보면 어떠냐고 권유해 주셨다.
또 '치료'였다. 이번에는 선생님으로부터 느리다는 것이 확정지어진 채. 가슴에 돌이 얹어진 것 같았다. 선생님은 최대한 좋게 말씀하셨으나, 오래 고민하다 하신 말씀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발달 검사를 괜히 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아이들을 보아온 경력으로 우리 아이르 볼 때 걱정되는 면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아이로, 튀지 않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아이가 느리지 않기를 바라는가. 빠른 아이가 있으면 당연히 느린 아이도 있을 것인데. 나는 우리 아이가 왜 중간은 하기를 바랄까.
어쩌면 문제는 아이가 아닌 내게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쉽게 위축되는 나. 그런 나에게 아이가 맞추어 주기를. 아이 역시 나처럼 자라주기를. 그렇게 바라는 마음 때문에 아이를 그저 느린 아이로, 모자란 아이로 보면서 괴로워하지 않았나.
아이가 어떤 모습이라도 나는 아이의 엄마이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아이를 느리다 손가락질해도 나는 아이의 편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이의 발달을 엄마로서 힘껏 도와야겠지만, 결코 그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에 나까지 길들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는 결국 발달 검사를 받았고, 언어 지연 판정을 받아서 언어 치료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아이의 언어는 계속 발달했고, 아이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나 역시 자라고 있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삶의 속도는 제각각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