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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Nov 25. 2024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정아은 작가의 <모던하트>를 읽고

헤드헌터인 미연은 일은 잘하지만 자신이 전문대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을 좋아해주는 '흐물'(이름은 따로 있지만 미연이 그렇게 부른다)과, 자신이 좋아하는 태환이라는 남자가 있다. 흐물은 미연이 부르면 언제 어느 때고 나와서 돈을 쓴다. 주식이 올랐다며 과한 것을 사주고 선물도 준다. 태환이라는 남자는 늘 미연을 제 회사 쪽으로 부른다. 베풀고 주는 대신에 자신에게 미연이 맞추기를 은연 중에 바란다. 미연이 흐물이 아닌 태환을 마음에 두는 것은, 태환이 Y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동생 역시 서울대 출신 남편과 결혼해서 고시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미연은 그 학벌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끝까지 제 편이었던 '흐물'을 떠나보내고 만다. 그러고 나서 태환과 본격적인 교제를 하지만 미연은 자신이 태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버린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그저, 태환이라는 간판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흐물거렸다. 미연과 흐물과의 관계가 아파서였을까. 흐물은 미연이 제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쓴다. 미연 역시 그것이 사랑인 줄 알면서 외면한다. 흐물 앞에서는 본연의 모습이 되는 미연은, 태환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된다. 태환이 채식주의자라는 이유로 고기도 먹지 않고, 클래식도 좋아하는 척을 한다. 태환이라는 간판을 얻기 위해 미연의 존재 역시 간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던 미연에게 어느 날 태환이 먼저 연락을 해서 나오라고 한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정성스레 화장을 하는 미연에게 오랜만에 전화한 여동생이, 태환이 여자와 함께 지나가는 것을 봤다고 한다. 미연은 태환을 만나는 대신 흐물을 불러낸다. 흐물은 미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눈을 맞으며 춤까지 춘다. 그러나 미연은 결국 태환의 전화를 받고 가 버리고, 그날 태환과 잔다. 그리고 그날부터 흐물은 미연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날 밤에 나는 내내 흐물의 꿈을 꾸었다. 사나운 꿈자리 속에서 겨우 탈출한 나는 다음 날도 흐물의 생각을 했다. 계속 흐물흐물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치 미연에게 흐물 같았던 존재, 어디든 불러내면 나타나고 책임을 져 주었던 존재, 거리에서나 어디에서나 즐겁게 해 주었던 존재가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과 활동은 하지 않고 동아리 활동만 열심히 했었다. 마침 군대에 갔다가 나와 같은 3학년으로 편입한 복학생 선배들이 들어왔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나의 흐물은 그 복학생 가운데 있었다. 나와 다르게 자신감이 넘쳤고, 사람들을 모을 줄 알았으며, 일을 굉장히 잘했다. 굳이 따지자면 흐물흐물한 것은 그쪽이 아닌 나였다. 그런데 그는 유독 나에게 잘했다. 내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언제고 나타났고, 학교에 유명한 강연자가 오면 자리를 맡고 기다려 주었다. 그는 한 마디로 내게 '든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태환이 있었다. 내가 맞춰주고 싶고, 만나기 위해서는 언제든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존재였다. 나는 태환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지만 태환은 나에게 잘해주면서도 결정적인 관계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그저 우리는, 농담따먹기나 하면서 뱅뱅 돌 뿐이었다. 그러고 있을 때 흐물이 내게 고백했다. 나는 흐물을 이용해서 '태환'에게 어필했다. 나 이런 사람 있다, 이래도 나를 놓칠 거냐. 그런 속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 학교 선배한테 고백 받았어요."


태환은 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른 사귀라고 말했다. 나는 흐물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사귀라는 데, 보란듯이 사귀지 않고 별 수가 있나. 태환은 나에게 축하파티까지 해 주었다. 흐물에게 나는 일단 만나 보자고 했다. 흐물과 나의 연애담은 실시간으로 태환에게 전송되었다. 태환은 제법 '친오빠' 포지션에서 나와 흐물의 관계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태환이었고, 흐물은 그저 이용을 당한 것뿐인데. 그것을 태환은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능청스럽게만 굴었다.


때로 나는, 이렇게 가는 것이 맞는가 싶었다. 하지만 달리는 차에서 브레이크를 걸 수가 없었다. 흐물과 내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이 되었다. 그리고 태환 역시 여자친구가 생겼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나보다 일찍 결혼했다. 그리고 나도 흐물과 결혼했다. 태환과 연락은 끊겼다. 그리고 흐물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헌신적인 부분은 있지만 결혼 전에 나는 흐물이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 아마 흐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을 것이다.


미연이 흐물과 결혼했으면 행복했을까. 그러면 해피엔딩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마 미연은 자신의 학벌 컴플렉스를 끝내 극복하지 못해 흐물과의 관계도 파경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흐물도 결혼 후에는 헌신적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미연을 얻기 위해서 연기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미연이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학벌 컴플렉스가 없고, 자신에 대해 당당하다면, 미연은 태환 앞에서 채식주의자인 척할 필요도 없고, 흐물을 불러내면서 이용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연애 전에 필요한 것은 자신과의 관계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부분이 해결이 되지 않으면 연애도 결혼도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결혼을 하고 나서, 태환과의 연락도 끊겼을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결혼한 사람이 흐물이 아닌 태환이었더라면. 내가 '진짜' 좋아한다고 믿었던 그 사람이었다면.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은 그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던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동경'했던 것임을. 마치 미연이  Y대 출신인 태환에게 가졌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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