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읽고
여자는 말을 잃고 희랍어를 배운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는 까닭은, 그보다 어린 시절 말을 잃었을 때 전혀 몰랐던 프랑스어 한 단어에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바람과는 다르게 희랍어를 아무리 배워도 잃어버린 언어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혼 후에 떠난 아들이, 그리고 죽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듯이.
12월. 응급실에 가느라 하루를 빼먹은 것을 제외하면 나는 매일 글을 썼다. 쓰면서, 내가 쓸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었나 생각을 하는 동시에 쓸 이야기가 이렇게 없는 사람이었나를 생각했다. 어려웠던 것은, 그저 사소하게 지나치고 싶은 것들도 하나하나 모두 언어화를 하다 보니까 지나치게 피곤해진 것이었다. 계엄도, 남편과의 다툼도, 아이와의 마찰도,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마음 아픈 사고도 그저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을 하나하나 붙들어 언어로 표현을 하다 보니 그것들이 내게서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언어는 힘이 있어서 내가 표현할 때 비로소 의미가 되었다.
말을 잃은 여자는 생의 의지마저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아이가 외국으로 떠나서 이제 엄마를 볼 수 없다고 하는 말에 걷고 또 걸으며 켜켜이 쌓인 아이의 흔적을 지워낸다. 새로 배운 희랍어로 시를 끄적이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한 희랍어 교사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를 병원에 데려가고, 집에 데려다 주면서 그가 안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다. 언어를 잃었지만 여자에게는 생의 의지가 충만하며, 그래서 여자는 더 깊이 제 안에 침잠한다. 지우고 지워내도 여자에게서 사람의 흔적을 닦아낼 수는 없다. 아이가 떠나도 여자는 엄마이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이웃이며, 새 언어를 배우면 그것으로 새로운 말을 끄적일 줄 아는 창조적인 존재이다.
언어를 간절히 지워내고자 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그만큼 더 생에 간절해진 여자의 모습을 보았다. 나 역시, 한 달 남짓의 시간 동안 내 삶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내 삶에 좀 더 진실해진 기분이 든다. 물론 아직 많이 멀었지만, 이것이 시작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퇴고의 시간이 극도로 부족하여 늘 아쉬운 글을 내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글 하나하나가 내 삶의 조각이라고 생각하면 남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제 이 글도 하나 더 쓰면 끝이 난다. 내일은 더는 아픈 사건이 없기를. 그래서 아주 즐거운 글로 이 한 달의 장정을 마칠 수 있기를. 그렇게 2024년 마지막 날을 잘 흘려보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