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보아야 할 것

내가 살아야 남도 살린다

by 나무나비

여행을 왔다.


오랜만에 오는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아이를 맡기고 혼자 비행기를 타는데, 또다시 그의 생각이 났다. 두고 온 아이도 아니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남편도 아니고, 별로 친하지 않았던 그의 생각만 났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답답하고 궁금해서 여러 심리학 관련 유투브 채널을 찾아보았다. 처음에는 회피성 성격 장애를 찾아보았다. 그의 모든 행동이, 회피로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피성 성격장애는 유투브에서 찾아본 바에 따르면 그의 성격과는 좀 달랐다. 사람을 사귀는 것 자체에 회피적이고 소극적이며 사람들과 마음 나누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회피성 성격장애에 비해 그는 평소에는 그다지 회피적이지 않아 보였다.


그러면 대체 뭘까. 나는 다시 찾아보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억울해하는 걸까. 그리고 그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나를 소외시키는 것 말고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단순히 사람들과의 사귐이 힘들거나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다가, 나는 여행 내내 마치 그와 여행을 온 것처럼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이러지, 왜 편하게 여행 와서 그의 생각만 하고 있지, 이래서야 비행기표가 아깝고 시간이 아깝고 숙소비도 아깝고 밥값도 아깝잖아.


그리고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정작 안달이 난 것은 나였다는 사실을. 나는 그에게 다시 의존하고 있었다. 처음에 트러블이 있었을 때, 그리고 미움 받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내가 왜 이것을 힘들어하는지 '나'에게 초점을 맞추자고 해 놓고 다시 그에게 초점을 돌이키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나의 약한 부분이, 그의 약한 부분과 아귀가 맞듯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어렵다. 그것 때문에 평생 직장이라고 여겼던 곳도 나왔던 나이므로. 그러니 다시 나는 시선을 내게 돌이켜야 한다. 하지만 왜 그것이 어려운가.


문득, 나는, 내가 계속 이런 입장을 고수했을 때의 다른 어린이집 엄마들의 판단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풀어보려 하지 않았냐고, 왜 그와 화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냐고, 물론 나는 나름 최선을 다 했지만 지금은 그와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더는 그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하지만 혹자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만났을 때 더 집요하게 그 사실에 대해 캐묻지 않았냐고. 전화가 될 때까지 전화하지 않았냐고. 톡으로 대체 왜 그러는지 이야기를 해 보자고 하지 않았냐고.


실은 나는 그와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두렵고,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두렵다. 그와의 대화가 더 상황을 악화시킬까 봐 두렵고, 이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알려잘까 봐 두렵다. 그래서 이렇게 피하고 있는 것을 비겁하다고 누군가 욕할까 봐 두렵다. 그래, 나는 여전히 외부에 시선을 향하고 있으며 그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내 존재는 여전히 약하며 나는 사람들에게 의존한 채로 살고 있다. 변한 것 같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나는, 드디어 결론에 다다랐다.


얼마 전에 세부에 갔었다. 우리는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입수했다. 나는 수영의 기초 정도를 할 줄 알았고 물에 뜰 줄도 알았다. 더구나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으므로 몸에 힘만 빼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물에 잠긴 순간 너무도 두려웠고, 그 순간에 내 남편은 내 아이를 내게 맡긴 채 어디론가 가 버렸다. 순간 나는 이 아이를 망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고성을 질렀다. 제발 나 좀 도와달라고, 구명조끼를 입은 채로 사력을 다해 튜브를 잡은 채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위험한데, 내가 바다에 빠질 것 같은데, 남을 구할 수는 없다. 그것이 심지어 나의 아이라도 마찬가지다. 남을 구하려면 우선 내가 완전히 안전해져야 한다. 조금 익숙해진 후에는 나는 자유롭게 다니면서 바다를 관찰했고, 튜브에 올라 앉은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돌보았다. 그것은 구명조끼가 바다에 확실히 뜨는 것을 경험한 후에나 가능했다. 나는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은 후에야 내 아이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나에게 비난할 수 있다. 왜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해결해 보려고 하지 않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 역시도, 안전하지 않았다고. 그의 투명인간 취급에 나도 상처 받았고, 그래서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그저 같은 어린이집 소속 부모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서 서로가 곤란한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그가 나를 오해하고 있고 여전히 그 오해에서 나오지 않고 있지만 나 역시도 그의 태도에 상처를 받고 그전에 그것에 대한 깊은 상처가 있어 오래 괴로웠다고. 나는 안전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충분히 안전해질 때까지 스스로를 돌볼 필요가 있다고. 그것에 대해서 당신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자격은 있지만, 나 역시 내 입장을 정확히 전달할 자격이 있다고.


실은 내가 처음에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신앙적인 이유이다. 바로 계속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중에,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를 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체험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일으키지는 못하리라. 나 역시도 이게 맞나, 하고 여러번 고개를 갸웃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확실히 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나이며, 나의 어려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나이며, 나를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할 사람도 바로 나인 것을. 나와 아주 친한 이라도, 내 일에 나처럼 기뻐하고 괴로워하고 화를 낼 수는 없다. 내가 이야기를 해서 공분을 하더라도 그때 뿐이다. 사람의 관계란 것이 그렇다. 그러니 나는 가장 먼저 나를 지키고, 나를 회복시키며, 나를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그 후의 일은 후에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여행에서 얻은 가장 갚진 선물이며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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