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어린 시절 성장통을 묘사하였다면,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청소년기의 고뇌와 아픔, 절망을 이야기하였다. 신학교 생활을 못 견디고 뛰쳐나온 본인의 경험을 쓴 자전소설로 동 나이대 같은 고뇌를 겪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정적 울림을 줄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많은 고등학생이 이 소설을 보면서 한스 기벤라트의 절망에 공감할 것이다.
한스 기벤라트는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영특한 그는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주의 신학교에 입학한다. 이는 평생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의 삶이 보장됨을 뜻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과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학우를 만난다. 하일리라는, 정형화된 당시의 학생들과는 많이 동떨어진 친구를 만나며 기벤라트라는 열차는 정해진 철로를 벗어난다. 독특하고 반항적이었던 하일리는 신학교의 생활에 스며들지 못한 채 겉돈다. 그러다 결국 하일리는 신학교를 탈출하게 되고, 이 사건은 기벤라트의 심리적 반항을 배가시킨다. 이후 방황의 지속으로 성적은 자꾸 떨어지고 교우관계도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기벤라트 또한 신학교를 벗어난다.
해방감과 패배감을 동시에 품고 그는 마을로 돌아온다. 동급생에게 우월감을 안고 떠난 마을로 돌아온 기벤라트는 패배주의에 휩싸여 자살을 시도하지만 감행하지 못한다.
마을에서 과일을 수확하는 가을, 기벤라트는 구두장이의 조카인 엠마와의 조우에서 이성의 관심에 눈을 뜨고 짧은 연애를 한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선 기벤라트와 달리 엠마는 익숙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기벤라트는 추수 시기 잠시 머문 친척 집에서 일어나는 장난에 불과했고, 말없이 떠나간 엠마에게 기벤라트는 배신감을 느낀다.
첫 연애가 주는 열병을 잠시 앓고, 장래를 고민하며 기벤라트는 옛 친구 아우구스트를 찾아가 기계공의 길을 걷고자 한다. 기대감을 한 몸에 받던 수재가 기계공을 뒤늦게 준비한다는 주변의 비아냥에도 기벤라트는 노동의 고단함으로부터 성취감을 느낀다. 주말 오후 기계공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른 동네에서 맥주를 마신다. 술이 주는 즐거움이 지나가고 숙취가 가져올 고통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다음날 강가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의 죽음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다.
다소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학창 시절 교육체제에서 받은 고통을 회상하였을 것이리라.
지금에서야 생각하면 그깟 시험 따위에 왜 그렇게 압박감을 느꼈는지 웃어넘길 수 있지만, 당시는 한두 번의 시험이 내 인생의 경로를 결정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그러한 압박감이 청소년기의 생동감을 억눌렀고, 그랬기에 학창 시절의 추억을 회상할 때면 그리움보다 안갯속에 갇혀버린 듯한 막연함이 더 크다.
대체 하루 십 수시간의 학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물론 그때 쌓은 지식이 오늘을 살아가며 얻는 새로운 지식의 근간이라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른의 삶에 익숙한 지금의 내가 학창 시절의 노력을 평가한 결과일 뿐이다. 당시에는 하루하루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 속에 살았었다.
'어째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위험한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던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렸던가? 왜 라틴어 학교 시절 그를 친구들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던가? 왜 낚시질이며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금지했던가? 왜 심신을 갈가리 찢어놓을 뿐인 쓸데없는 공명심을 부추겨 공허하고 저속한 이상을 불어넣었던가? 왜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마땅히 누려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던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노새는 길가에 쓰러져서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수동적인 노력의 허무함이 저 한 문단에서 처절하게 느껴진다. 기벤라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소중한 안식을 빼앗기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묵묵히 주어진 학습량을 소화했다. 목적 없는 공허한 노력이 얼마나 위태로우며 주위 환경에 쉽게 흔들리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드는지 느낄 수 있다.
한스는 신실한 신앙심도,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투철한 직업의식도 없었다. 그저 우등생으로서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압박과 다소간 우월감, 적당한 공명심이 학구열의 원동력이었을 뿐이다. 그런 기벤라트는 모든 걸 초월한 하일러를 만나면서 그의 내면이 송두리 채 바뀌어버렸다. 그의 의지와 열정의 뿌리가 깊었다면, 그리고 그간의 노력에 대한 당위성이 충분하였다면 하일러와의 교제 때문에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헤세는 이러한 내면적 고뇌뿐 아니라 억압적 교육제도의 부조리도 신랄하게 표현한다.
'선생들은 한 명의 천재보다 열 명의 얼간이를 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선생의 역할은 정상을 벗어난 인간이 아니라 라틴어를 잘하고 수학을 잘하는 꼼꼼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제도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고발한다. 사회의 혁신적 발전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로부터 이뤄진다. 그 외의 99.999%의 사람들은 사회가 원활히 움직이기 위한 하나의 부품이 될 뿐이다. 교육이란 학생을 젊은 시절의 무한한 가능성을 억누른 채 하나의 부품으로 육성할 뿐이다. 교육제도의 이러한 한계 때문에 학생들은 이해와 포용 없이 정제된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받는다. 그렇기에 많은 학생의 방황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우리나라의 교육체계에 대해 창의성을 말살하는 비효율적인 교육 체계라며 비판한다. 하지만 헤세의 말처럼 교육의 목표가 천재가 아닌 둔재, 사회의 동력 엔진이 아닌 하나의 부품을 양성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교육체계는 목적에 알맞게 설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참 씁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불합리함을 느끼지만 이를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0.01%의 비범인이 되든지, 그렇지 않다면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수많은 학생들은 좋아하는 것도 모른 채, 아니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학습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학원 버스에 오른다. 슬프지만 이것이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기벤라트의 불행의 원인은 능동성을 말살하는 교육체계에만 있지 않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서로의 온기 속에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한스가 주변에 의지하고 기댈 사람이 있었다면, 과연 그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영특한 자식에 대한 자부심과 공명심만 가득한 아빠. 영특한 인재로 가르쳐 자신의 훈장이 되어 주길 바란 선생들. 단 한 명의 친구였던,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비범함에 오히려 한스 기벤라트를 감정적 해소구로 이용할 뿐이었던 하일러. 이성의 관심을 눈뜨게 해 줬지만 그저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던 엠마. 우등생에서 평범한 학생으로 전락한 그를 조소하는 마을 사람들까지. 어느 하나 기벤라트의 주변에는 그의 감정을 보듬어주고 방황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 오히려 그의 실패를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만 넘칠 뿐이다.
기벤라트의 상처가 자꾸만 덧나는 과정을 바라보며,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는 유아독존의 마음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 느꼈다. 안온한 환경에서는 혼자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의 풍파 속에 흔들려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서는 의지할 이가 반드시 필요하다. 공부에도, 우정에도, 사랑에도 모든 게 서툴렀던 한스를 이끌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리고 어리숙한 그는 길라잡이 없는 인생에 길을 잃은 것이다. 탈선한 열차에 브레이크조차 없다. 그렇기에 그의 박명은 필연이었다.
불합리한 교육제도와 그로 인한 개인의 파멸을 자신의 경험을 빌려와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그렇지만 기벤라트의 절망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기벤라트의 모습에서 학창 시절의 나를 보았다. 그리고 생기 없는 표정을 하고 있던 수많은 학우들을 보았다. 하지만 저 밖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 앞으로 경험할 학창 시절은 잿빛이 아닌 다채로운 화사함이길 바란다. 헤세가 창조한 인물의 삶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걱정하며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그가 왜 대문호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