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나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척 좋아한다. 그곳에 가면 수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정적이 있다. 이와 함께 수백, 수천 년 전의 작품, 유적과 마주하고 있노라면 30여 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살아온 나로서는 역사적 세월의 방대함에 시간이란 관념이 무감각해지곤 한다. 마치 시간이 멈춘듯한 기분이다. 그렇게 과거 현인들이 남긴 수많은 작품과 흔적을 보며, 그곳이 주는 고요함 속에서 나만의 사색에 온전히 빠질 수 있다.
그렇기에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포함된 책의 제목만 보고 바로 독서를 시작하였다.
저자인 패트릭 브링리는 잘 나가는 기자였다. 그러나 우애 좋고 존경하던 형의 죽음으로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바쁘고 정신없던 삶 속에 직업적 회의를 느껴 남부러운 직장을 관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취직한다. 혹자는 왜 잘 나가는 직업을 뒤로하고 경비원을 택하냐고 반문을 할 수 있지만, 그는 고요한 미술관에서 안식을 찾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 흔히 크게 성공할 직업이라고 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업가가 마침내 통화를 마치자 모든 것이 평화를 되찾았고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중 시간에 대한 세 가지 묘사가 나온다. 화살(기술의 진보와 같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원(행성의 공전, 계절의 오고 감 같이 순환적 시간), 제트(고대 이집트의 신들의 시간이자 영원불멸의 정지된 상태와 같은 시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안주하고 정체된 삶은 곧 뒤처짐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발전 지향적인 삶을 진리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이집트 인이 말한 시간의 의미인 네헤(neheh, 수백 만년간)의 진정한 뜻을. 해가 뜨고 지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여름이 가고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또다시 여름이 오는 '원과 같은 순환적'이며 단순하고 반복적인 현상이, '화살 같이 일방향적이고' 빠른 진보를 이뤄낸 수백 년의 역사보다 무려 수천, 수만 배는 길다는 것을.
발전적인 인간의 향상심이 자연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바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깨닫기 어렵다. 형을 잃은 아픔을, 성공적인 미래가 보장된 마천루 사이의 직장을 벗어나 수천 년의 거장의 숨결이 잔잔히 내리 깔린 정적의 미술관에서 해소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브링리는 시공간의 정체가 주는 안온함을 만끽한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시간이란 흐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꿀맛 같은 주말이 흘러가고 월요일이 다가오는 것처럼 주말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가는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다. 어째서 이 물리학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말을 한 것일까?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변화는 주관적인 관념이다. 온도의 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절대적 온도 값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듯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시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시간적 관념은 모두 다르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증명했듯 이동 속도나 중력의 영향에 따라 모두 다른 시간적 개념을 갖는다. 나의 한 시간이 어느 곳에서는 수백 년일 수도, 어딘가에서는 찰나 일 수 있다. 절대적 기준이 없기에 시간을 흐른다고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KTX를 타건 비행기를 타건 인간의 기술력이 선사한 속도는 체감되는 시간적 차이를 유발하지 않지만, 시간관념의 주관성을 물리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카를로 로벨리의 저서를 인용한다.)
그렇다. 자연에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없다. 우리 모두 각자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현대인은 '화살'과 같은 세속의 시간 속에 갇혀 발전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을 채찍질한다. 가끔은 쫓기는 듯 한 강박에서 벗어나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브링리가 경험했을 제트의 시간 속에 머물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가올 휴일에는 박물관을 방문해야겠다. 일과 육아의 병행으로 심신이 조금씩 지쳐가는 요즘, 정체된 시간 속으로 안정을 찾아 떠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