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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개발 예산 25% 삭감 소식

- 말 나온 김에 생각 좀 해보자!

by 나무Y

"Again?! I knew that!"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개발 예산을 25% 삭감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연구개발 예산 배정에서의 카르텔' 이라는 용산의 언급에서 시작되었다는데, '카르텔' 이 뭔 말일까?카르텔 ? 연구개발 생태계? ...


한 때는 이런 뉴스가 뜨면, 내 일상이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되므로, 애먼글먼 했었다. 그러나 이제 몸의 반은 출연연을 떠난 입장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Again?! I knew that!" 정도로 반응하게 된다. 게다가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다 보니, 앞으로 벌어질 일도 어느정도는 내다 보인다.


지난 30여년을 돌아 보면, R&D 예산 삭감은 사실 반복적으로 있어 왔다. 가장 최근의 일로는 아마도 지난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2017년 무렵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의 연구개발비 축소는 창조경제의 일환으로 중소기업 및 민간에 대한 직접 지원이 확대되고, 그 여파로 정출연 예산이 축소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연구현장의 돈 가뭄은 심각해서, 과제 수주를 위한 내부 경쟁이 어마 어마했었다. 좋았던 시절을 지나 내리막을 걷고 있던 기술 분야의 부서 책임자였던 나는 인건비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었었고, 불면증을 앓게 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물론, 우리 부서만 힘든게 연구원 전체가 대체로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정출연의 R&D 예산 삭감은 직접적으로는 정부가 정출연에 기대하는 역할과 성과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나, 크게 보면 사실 정부의 가용 자원과 정책 우선 순위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솔직히,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이 민생에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과기정통부는 전통적으로 힘이 있는 부처도 아니다. 그러니, 정부의 가용 재원이 빠듯할 때, 또는 여러가지 이유로 추가적인 예산 확보가 필요할 때,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 예산이 손쉬운 타겟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듯 하다.


그 경위가 어찌되었던, 일방적으로 예산 삭감을 통보받아 군소리 없이 실행해 내야 하는 정출연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목표와 인력, 예산'으로 짝을 맞춘 중단기 과제들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갑자기 예산을 25% 이상 줄이라고 하니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예산에 맞추어 목표나 인력을 유동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떤 기술의 연구개발의 목표라는 것이 예산에 따라 엿가락처럼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니, 예산 삭감은 연구현장에 많은 난맥상을 불러 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말 나온 김에 자아성찰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자면...


어쨌든 R&D 예산 삭감의 파도는 밀려 오고 있다.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자아성찰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자.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에 정출연으로서의 역할과 성과에 대해 우리 스스로 어떤 방향과 기대치를 가져야 하며, 어느 정도의 투자가 필수적으로 필요한지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자는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80~90년대의 IT 기술 산업의 폭발적 성장기에 맞물려 정출연은 양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어 냈다. 전전자교환기와 CDMA 기술을 비롯하여 의미있는 산업적 성과도 일구었다. 그리고, 그동안 민간의 경쟁력은 일취월장하여, 일정 부분 글로벌 수준으로 올라섰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 민간의 기술력을 선도하여 국가 부흥의 기초를 만든다는 정출연 설립의 애초 목적과 역할을 잘 수행한 셈이라고 하겠다. 물론, 민간의 기술력 제고에 정출연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고, 산업 분야 중에는 아직도 국내 기술력이 취약한 분야도 많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제는 정출연의 핵심 역할을 민간의 기술력 선도 혹은 산업화 기술 연구개발이라고 하기에는 시대 착오적이다. 이제 사람으로 치자면, 30~40대의 중장년기에 들어선 정출연의 핵심 역할은, 그렇다면, 무엇이어야 하며,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기여해야 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남는다.


어찌되었던, 정출연이 갈 수 있는 길은 두갈래 길의 하나 일 것이다. 그 하나는 산업화 현장과 밀결합되어 중단기적으로 산업화 기술 연구개발을 통해 돈을 버는데 직접 기여를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간이 직접 투자하기 어려운 원천기술 연구 개발을 통해 미래를 도모하는 길이다. 물론, 두개의 길이 뚜렷이 구분되고, 그 길 중의 하나만을 택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존재의 이유로서 메인 스트림은 분명히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30여년의 개인적 경험과 지금의 연구개발 환경 변화를 고려하면, 앞으로 정출연은 중장기 미래 원천연구 위주의 질적 도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출연의 현실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지만, 정부 출범 때마다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정출연의 위치, 단기적 시각의 R&D 정책 방향과 예산 확보의 어려움, 내부적으로는 열악해 지고 있는 인력구조, 지나치게 비대한 조직, 급변하는 기술산업 환경 속에서의 단기 성과 창출의 한계, 관료화되고 있는 연구개발 관리 문화... 이러한 문제들이 구조적으로 이리 저리 얽혀 있다. 그 와중에 각 정권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원천연구, 또 때로는 산업적 성과 창출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쫓아 다니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미래 핵심원천 연구 위주의 조직으로 거듭나기에는 양적으로 너무 성장했고, 너무 방대한 조직이 되어 있다.


지난 정부에서는 다른 공적 영역이 그러하듯이 연구개발 예산도 많이 증가된 것으로 알고 있다. (20~30% 정도는 증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것은 확인이 필요하다.) 그즈음 예산 확보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전해 듣곤 했는데, 이전에 돈 고생을 많이 했던 나는 속으로 후배들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목표와 인력과 예산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예산이 있을 때, 내리막을 걷고 있는 기술 산업 분야들을 축소하고 가능성있는 미래 기술 쪽으로 예산과 사람을 보내야 한다. 즉, 돈이 있을 때, 접을 것은 접고, 줄일 것은 줄여야 한다. 물론 이 또한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축구가 뜰 것이라고 해서, 배구 선수들을 축구팀으로 보내면 그 축구팀이 경쟁력이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예산이 있을 때, 다시 몸집을 키울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재정립하여 조직을 재정비하고, 내실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실체적 주인이 없는 공공기관으로서의 정출연의 특성상, 미래를 내다보며 스스로 뼈를 깎는 리스트럭쳐링을 뚝심있게 해 낼 수 있는 경영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국가연구소로 거듭 날 때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몇 년 만에 또 다시 연구개발 예산 삭감이 구체화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예견된 일일 것이다. 예산 삭감이 언급되기 시작하면, 연구 현장에서는 사실 별 도리가 없다. 제로 섬 게임, 아니, 마이너스 섬 게임에서 각자의 밥 그릇을 덜 빼앗기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R&D의 목표나 방향이 아니라 예산 삭감이 목표가 되면, 그 과정에서의 절차적 공정성이 최 우선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가장 손쉬운 대안으로 상대 평가를 통한 줄세우기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과제 책임자는 예산을 지키기 위헤, 평가에 올인하게 되고, 구성원들은 본의 아니게 성과 포장과 미사여구로 마사지한 자료 만들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밖에 없다. 본말의 전도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간혹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내부 구성원들도 정출연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대 변화에 맞추어 거듭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지만, 그런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 것일까? 자의적으로 어딘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는 것일까? 존재의 역할과 사회적 기여가 모호할 때 우울감과 무력감을 느끼듯, 지금 정출연의 구성원들도 집단적인 무력감에 빠져 들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 우울증이 꽤나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현장을 떠났기에, 저 의미없는 예산 삭감 경쟁에 내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솔직히 안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 과정들을 여러차례 겪어내며 내가 살아 남았듯이, 후배들도 결국 살아 남을 것이다. 외곬수 모범생들의 지나친 성실함이 정출연이 가진 생활력으로 연결되어, 정부가 무엇을 요구하던 그저 입다물고 왠만큼 맞추어내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는 본질을 벗어난 일들에 안타깝게 소비될 것이다.


바라건대, 되풀이 되는 정출연 예산 삭감, 이런 것은 그만하기를 바란다. 문제가 있다면(물론, 문제가 있다. 아니 문제가 크다.), 정출연은 이제 졸업을 시키고, 국가출연연구소로 재정비하기를 기대한다. 정권의 정책에 따라 왔다 갔다하는 조직이 아니라, 국가의 비전과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핵심 분야의 장기적 원천기술 위주의 국가 연구 조직으로 재정비 할 때가 되었다. 너의 역할이 뭐냐는 질책속에, 밥그릇이 커졌다 줄었다 하며,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것 보다는, 단촐하게 몸을 추스려, 다시 먼 항해를 떠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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