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을 추억하며
일리노이 주립대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의 어느 학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동남아시아 어디쯤의 사람으로 보였는데, 차림새나 분위기가 꽤나 세련된 느낌이었다. 나는 생애 처음의 해외 출장길, 학회장의 연회에서 외톨이로 겉돌며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프랑스 어느 연구소에서 왔다는 그가 자꾸 말을 걸며 다가왔다. 40대 초중반쯤은 되었을까... 눈빛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아직 어렸던 나는 그를 피해 다니느라 더 힘이 들었었다.
생각하면 '아이고.. 나도 참... 그때 .. 어렸구나' 싶다. 아마도 그는 이민자로서의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양인이 거의 없던 학회에서 어쩔줄 몰라 하는 동양의 조그만 여성에게 말을 걸어주려 했던. 그 때, 나는 까만 자켓을 입고 있었다. 딸의 먼 해외 출장길을 염려한 엄마가 안주머니에 비상금을 넣어 꽁꽁 꼬매서 건네 주었던 그 까만 자켓, 눈에 선하다.
삼십대 초반에 스위스 제네바 출장을 자주 갔다. 그 어느 해, 레만호에서 보낸 오후가 어제 일 같다. 레만호를 건너 불어 오던 바람, 햇살에 반짝이던 눈부신 호수, 점점이 떠 있던 요트들.. 보고 있자니, 난데없이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는 이렇게 딴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고 있구나, 이런 좋은 세상을 엄마는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울컥하여 절로 눈물이 흘렀다.
훗날, '어딘가 멋진 풍광을 보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안타까워 한다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 내 젊은 날의 레만호가 떠올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를 사랑했구나.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못하고 말았다.
올해 봄, 벚꽃과 온천을 찾아 떠난 북규슈 여행의 마지막 밤, 후쿠오카 캐널 시티 근처 운하 주변을 맴돌며 날이 어두워져서 나카스 야탸이 포장마차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녁 5시쯤, 하나 둘 포장마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포장마차 안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로 순식간에 꽉 찼다. 우리도 그 중의 한 포장마차에 운좋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포장 마차를 빙 둘러싼 낡은 벤치의자에 빽빽이 낑겨 앉은 스무명 남짓의 사람들이 음식을 고르고 주문하느라 왁자지껄했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할매가 요리 조리 다니며 주문을 받아,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젊은 주방장에게 전달을 하면, 주방장이 목청껏 주문받은 음식을 복창했다. 소란스럽지만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분위기에 나도 문득 유쾌한 기분이 되어, 오뎅과 핫사케를 주문했다. 이어서 무엇을 더 먹어볼까 두리번 거다가 옆자리 일본 총각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다행히 영어로 왠만큼 대화가 되어 그 총각과 나는 더듬 더듬 대화 삼매경에 빠졌다.
"너, 지금 먹는게 뭐야?"
"이거, 후쿠오카 라면이야."
"맛있어?"
"그럼. 후쿠오카에 오면 꼭 먹고 가는 음식이야.
나는 이거 면 추가해서 두 그릇째 먹고 있어!"
"I see~ 후쿠오카가 너의 홈타운이야?"
"아니야. 도쿄가 고향인데, 일이 생겨서, 오늘 기차 타고 내려 왔어.
내일 도쿄로 돌아 가야해"
"아.. 비즈니스 출장을 왔나 보네"
그 와중에 그는 면 추가를 포함한 후쿠오카 라면 한 그릇을 더 주문했고,
그 기세에 끌려 우리도 후쿠오카 라면을 주문했다.
후루룩 라면을 맛나게 먹으며, 이어진 수다...
"사실은, 아버지 여자 친구가 여기 후쿠오카에 살고 있어서,
몇해전에 아버지가 이리로 이사와서 그 분이랑 같이 살고 있어.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걷지를 못하게 되어, 몇달째 누워 계셔."
"아이고.. 유감이다야~"
나는 문득 목이 말라, 식어가는 사케를 들이키고, 그도 나를 따라 자신의 술을 한잔 마셨다.
"몇일 전에 아버지 여자친구가 전화를 하셨어.
아버지를 모셔 가라고.
그래서 내려 온거야. 내일 아버지 데리고, 도쿄로 돌아가.."
"그렇구나. 아버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아버지는 칠십 몇살이야..." (기억이 안난다.)
"다른 형제는 있어?"
"아니, 나 혼자야."
"그렇구나..."
세 그릇째의 후쿠오카 라면을 먹는 그에게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 나도 그저 라면을 먹었다.
그에게 소울 푸드 라는 후쿠오카 라면은, 그러나, 내 입맛에는 그저 그랬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먼저 자리를 뜨며, 그에게 도쿄로 안전하게 잘 돌아가기를, 아버지가 빨리 회복되기를 빈다는 말을 남겼다. 그도 한국으로 잘 돌아가라고 인사를 건네고, 그렇게 우리는 우물 쭈물 헤어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종종 후쿠오카 라면 총각을 생각하곤 한다. 삼심대 중반쯤 되었을까? 지극히 평범해서 이제 얼굴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앞에 쌓아 두었던 라면 그릇이 또렸하다. 그릇 바깥쪽의 파란색 파도 무늬, 그릇 가를 둘러친 진홍색 두줄 줄까지.
그에게 아버지의 뇌 MRI를 찍어 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노년의 엄마가 언제가 부터 걸음이 불편하여 이런 저런 검사를 받았지만, 뚜렷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참을 끌었었다. 몇년 후에, 혹시나 해서 찍어 본 뇌 MRI에서 양성 뇌수막종 진단을 받았었다. 뇌수막이 자라나 엄마의 뇌를 눌렀고, 그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 지신 것이다. 치료시기를 놓쳐서, 수술 후에도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아, 걷는 것이 불편하셨다. 엄마는 치료 시기를 놓친 것을 한탄하시며 늙어 가셨고, 조금씩 조금씩 거동이 제한되다가 결국에는 집에 갇히셨다. 집에 갇힌 엄마를 돌보느라 오빠 부부는 종종 싸웠다. 딸들도 지쳐갔다.
후쿠오카 라면 총각은 아마도 나를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종종 그를 생각하고, 전하지 못한 말을 떠올린다.
<사진출처: triple.gu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