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다보니 내가 누구였는지를 잊어 버렸다
30여년이 넘도록 직업인으로 살아 오는 동안 나는 성취지향적인 사람이 되었다. 세상이 나에게 요구한 일년, 한달, 하루 동안의 할 일 목록을 정리하고,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한 후 미션들을 클리어하고, 'to do list'를 하나 하나 지워가며, 세상의 인정을 받고 뿌듯해하는 삶에 익숙하다. 이제 일주일에 삼일 정도만 출근을 하는 반 은퇴자가 되었고, 직장은 나에게 더 이상 'to do list'를 들이밀지 않는다. 세상은 나에게, 이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즐기라고 하지만, 때때로(사실은 자주), 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습관적 조급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씩 지나치게 일에 몰입하거나, 가시적 성과에 여전히 집착하기도 한다.
지난 일년여의 반 은퇴자의 삶은, 그러니까, 집을 나서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듯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섰다가 결국은 두고 온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길을 나서는 심정 같았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의외로 비교적 순탄하게 잘 살아 온 듯한다. 일주일에 세번 꾸준히 요가를 하며 체력이 좋아졌다. 체력이 좋아지니, 방콕과 파타야, 북규수, 미국 그랜드 써클 트래킹 등 자유롭게 다녔던 여행도 아주 좋았다. 골프 라운딩도 비교적 자주 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물론, 거리도 줄고 스윙도 문제가 있어서 많은 부분이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우리 집 두 냥이, 꽁이와 H군과 보내는 유유자적한 시간들도 좋았고, 가끔씩은 하릴없이 늘어져 세상에 널린 영화를 날밤새며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책도 많이 읽었다. 누구는 일을 그만두고 우울증이 걸렸다고 하던데, 나는 원래 노는게 체질이었었나 싶을 때도 있었다.
하루 하루의 일상은 이렇게 비교적 잘 채웠지만, 사실 마음 속 저 깊숙이 나는 때때로 길을 잃은 느낌으로, 자문했다. 어딘가 가야할 중요한 곳, 해야 할 의미있는 일들을 놓치고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그래서 삶과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책을 찾아 읽고, 여러 선지자들의 강연을 찾아 듣고 있는 중이다. 가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나는 이제 조만간 반 은퇴자의 삶도 자발적으로 그만두고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가야할 곳을 찾아서가 아니라, 이제 관습적으로 머물러 있는 곳을 떠날 때 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요처럼 익숙한 삶으로 나를 되돌리는 이 가느다란 끈을 끊어내고 자유운동을 하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어느 곳에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삶이란 것이 결국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며 헤매는 것. 모범생으로, 성취지향적인 직장인으로, 일하는 엄마로서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쓰고 있던 틀을 벗고, 내 속의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 헤매는 것.
다만, 앞으로, 내가 쓰고 있는 '나'라는 틀을 벗어 자유로워지고, 지구에서 머무는 내 시간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이런 태도(가치관?)로 살아 보려고 한다.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정직할 것
겸손할 것
끊임없이 배우며 성장하는 시간을 보낼 것(특히 정신적 성장)
(무엇이 되었던) 두려움을 버리고 도전을 계속할 것
연민의 마음을 가질 것
가급적 꾸준히 봉사 활동을 할 것(내 시간을 타인을 위해 쓸 것)
세상이 내 요구의 반도 들어 주지 않더라도 유모어로 받아 들여 가볍게 삶을 건너가는 마음을 가질 것
쓰다 보니 어째 결국 'to do list' 처럼 된다. 일종의 직업병 같다. 어쨌거나, 타고난 성품상 저 리스트의 세번째와 다섯번째는 어쩌면 큰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에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내 삶의 이력을 돌아 보건대, 저 리스트의 첫번째와 두번째 그리고 마지막 항목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세상의 마일스톤을 따라 먼길을 걸어 왔고, 내가 누구였는지를 잊어 버렸다. 이제 다시 본래의 나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