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내 마음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이 감정은...
몇 달 동안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영화 관람권은 숙제 같았다. '저거 저거... 만료가 언제지? 잊지 말고 써 먹어야 되는데... '
그 관람권으로 어제 'Inside Out 2'를 보고 왔다. 차를 가져갈까 잠깐 망설였는데, 롯데시네마 가는 길의 자동차 행렬이 떠올라, 이 복더위에 그냥 지하철로 다녀왔다. 오래간만에 혼자서 백화점에 딸린 영화관을 찾아가서, 느긋하게 물건 구경, 사람 구경도 하고 모밀국수도 먹었다. 평일 낮시간이라 번잡하지 않아 좋았다. 영화관은 살짝 추워서 가디건을 챙길 걸 싶었고, 영화 앞 부분에서는 살짝 졸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봤다.
영화 'Inside Out'은 라일리라는 11살 여자 아이의 내면의 감정들이 어떻게 라일리를 제어하고, 외면으로 표출되는가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라일리가 겪고 경험하는 일상들이 뇌에서 선택적으로 무시되거나 층층이 쌓이고, 여러가지 감정(마음) 들이 그 일상의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처리할 것인지 라일리의 마음을 제어한다. 그리고 그 결과들이 라일리라는 소녀의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즉, 라일리의 인사이드에는 온갖 기억과 경험의 알맹이들이 모인 거대한 구조물들과 라일리의 감정들(Joy, Sadness, Anger, Fear, Disgust)이 존재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쌓아 둔 과거의 기억들이 어떤 감정인가를 건드리게 되고, 그 선택된 감정이 라일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Out) 제어를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라일리라는 존재의 자아가 되는 것이다. 몇년 전에 본 Inside Out 1편의 스토리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독특한 모습으로 의인화된 기쁨이(Joy), 슬픔이(Sadness), 버럭이(Anger), 소심이(Fear), 까칠이(Disgust)... 그리고 화면 속 어마무시한 (뇌 속) 기억의 알갱이 공(ball)들과 현란한 색깔의 거대한 구조물들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다가 Inside Out의 사전적 의미를 CHATGPT에게 물어 보았다. 컨텍스트에 따른 3가지의 다른 의미를 알려 준다. 안과 밖이 뒤집어지다(예: 옷을 뒤집어 입다), 무언가를 매우 잘 이해하다(예: She knows the book inside out.) 혹은 어떤 것이 완전히 변경되다/바뀌다(예: The plan was turned inside out.). 영화 제목으로서 Inside Out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말로 전달한다면 어떻게 번역되어야 할까? 살짝 궁금하다.
후속작인 Inside Out2 는 13살 소녀가 된 라일리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감정들을 다룬다. 사춘기를 맞아, 낯선 감정들이 라일리를 찾아온다. 그동안 라일리의 감정 제어권을 주도적으로 쥐고 있던 기쁨이는 뒤로 물러나고(오호 통재라...), 이 감정 저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감정 제어기를 쥐었다 놓았다 한다. 불안(Anxiety), Envy(부러움), Embarassment(당황, 부끄러움?), Ennui(무력감?)... 이 낯선 감정들은 맥락없이 불쑥 불쑥 라일리를 흔들어 댄다. 바야흐로 사춘기인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라일리가 베프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위기 속에, 하키 선수로서 사회적 인정(친구들의 인정을 통해 무리에 끼고 싶은) 을 열망하는 마음에 기대어 불안은 급속도로 자라나 라일리를 압도한다. 그동안 만들어온 '나는 괜찮은 사람' 이라는 긍정적 자아는 무너질 위기에 처하고, 라일리는 하키 경기에서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도를 넘으며 폭주한다.(아니 쟤가 왜 저러나? 사람들은 라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화면속 불안이가 감정 제어기를 쥐고 정신없이 이 단추 저 단추를 눌러대어, 눈이 팽팽 돌 정도의 자아 혼란을 보여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사춘기 아이의 Inside가 저렇게 불안하고 혼란스럽다고...?!!)
마음 속 의식의 흐름을 표현한 장면도 재미있다. 이 생각, 저 생각, 뜬금없는 온갖 생각의 흐름에 따라, 영상 속 라일리의 의식의 강에는 '피자' 조각도 떠 내려 가고, '브로콜리'도 떠 내려 가고... 온갖 것들이 두서 없이 둥둥 떠 내려간다. (1편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나 모르겠는데... 인간의 의식의 흐름이 얼마나 맥락없이 부산한지 확 와 닿는다.) 내 마음의 의식의 흐름에는 어떤 것들이 두둥실 떠내려 가고 있을까? 살까 말까 하며 좀 전에 보고 온 궁중팬도 떠내려 가고, 돈다발도 저기 떠 내려 가고 있다. 깜빡 잊고 널지 않은 채로 둔 세탁기 속 양말짝들도 엉켜 떠 내려 가고 있네. 어디 보자, 저어기 우리 집 냥이 들도 두둥실 떠서 헤엄을 치고 있다. 홍수라도 났나? 이런 난장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오만가지 생각이 휘리릭 지나간다.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만... 불안이의 맹활약으로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겪던 라일리의 Inside는 가까스로 기쁨이(말하자면 긍정의 마음)가 불안이를 감정 제어기에서 떼어내며, 안정을 찾고, 마침내 그 온갖 감정들이 만나 서로를 껴안으며 나아간다. 이 것은 13살 이전의 기쁨이가 주도하던 그 마음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한 감정들이 Inside에 혼재해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런 복합적인 모습이 바로 라일리라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듯 하다.
귀가길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노약자석 앞쪽에 서 있노라니, 앞의 할머니 한분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뭐라 뭐라 하신다. 가만히 들어보니, 지하철 안내 모니터 화면에 도착역이 영어로만 표시되어 어디가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으시단다. 그래서 무슨 역이라고 일러 드렸는데, 다음 역에서도, 그 다음 역에서도 할머니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신다. 고장이 났다, 왜 영어로만 표시가 되느냐, 고장난 것 아니냐, 여기가 무슨 역이냐...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시는 것인지... 그저 같은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시는 게다. 안내 방송을 귀기울여 들으시면 되겠구만, 그게 그렇게 큰일인 것일까 싶다.
걱정이 가득한 할머니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할머니 Inside에서 감정 제어기를 쥐고 흔들고 있는 불안이(Anxiety)가 영화 장면처럼 내 앞에 펼쳐진다. 세월과 함께 기쁨이(Joy)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불안이와 Fear, Ennui가 할머니를 흔들고 있다. 할머니는 아실까? 자신의 마음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젊은 언니 오빠들은 선 채로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 무얼 저리 보고 있을까 흘낏 보니, 내 옆의 젊은이 화면에는 원피스들이 두루룩 떠 있다. 문득, 지하철 차량 천장에 이리 저리 흐르는 시냇물 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의식의 흐름이 쫘악 펼쳐진다. 저기 아이스 라떼도 떠 있고, 그 옆 사람 둘은 서로 뭐라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한 쪽은 삼겹살에 소주가 떠 있고, 또 한 쪽에는 드라마 장면이 휘리릭 지나가다가 갑자기 삼겹살에 소주가 휘리릭 떠올랐다가 의식의 저편으로 휙 넘어간다. 지하철 천장에 펼쳐지는 요지경 속 상상의 세계에 혹해 있다가 나도 그만 정차역 안내 방송을 놓치고 말았다. 나를 보며, 여기가 어디냐고, 왜 영어만 나오냐고 또 같은 말을 하는 할머니를 당황스럽게 바라보다가 나도 덜컥 불안해 졌다. 내가 내릴 곳을 이미 지난 것 아닌지... 그렇게 지하철에 타고 있는 젊고 늙은 사람들을 보며,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는 과정 속의 "Inside Out 3", "Inside Out 4"... "Inside Out N"을 (상상으로) 찍으며 집으로 돌아 왔다.
그래서, 영화 Inside Out이 나에게 들려준 속 이야기는 무엇일까?
표면에 드러난 한 인간의 모습 속에는 실제로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감정들이 쉴 새없이 감정 제어기를 쥐고 버튼들을 눌러 재끼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순간의 어떤 인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에 그의 감정 제어기를 차지하여 그 사람을 흔들고 있는 감정이 불안인지, 두려움인지... 무료함인지... 다른 어떤 감정인지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내가 아닌) 타인의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들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특히나, 어떤 순간에 어느 감정이 감정제어기를 차지할 것인지를 트리거링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거대한 기억과 경험의 알갱이들 중의 무언가가 그 감정을 건드림으로써 일어난다(영화에서 보여 줬듯이...). 그러므로,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공유하지 않는 한, 우리는 타인의 그 거대한 기억의 구조물과 그 속의 감정들의 연결을 알수 없으며, 그렇기에 타인에 대해 Inside Out(완전히 잘 아는)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들여다 봄으로써 스스로에 대해 Inside Out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내 기억의 구조물 속의 어떤 알갱이 하나가 어떤 감정을 건드렸으며, 그 감정이 나의 감정 제어기를 쥐고서 미친 듯이 이 버튼 저 버튼을 누르고 있는 중임을... 그리하여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일에 곧 세상이 무너지는 듯 불안하거나, 손가락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 들고 있다는 것을 Inside Out(제대로 이해하고)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오니, 내 마음 속의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불안이, 소심이, 무료함... 등이 영화 속 귀여운 캐릭터 처럼 생생이 느껴진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내 발 밑에 얌전히 엎드려 졸고 있는 꽁이를 보노라니 , 초록의 숏 커트 헤어에 두 눈을 반짝이는 생기 충만의 기쁨이가 내 감정제어기를 살살 돌리고 있음을 느낀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lenbrookcinema.com.au/movies/inside-ou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