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릴케의 가을날이 떠오르는 인생의 계절 이야기
몇해전 우연히 만난 영화 'Another Year'는 2010년에 개봉된 영국 영화로서, 60대의 부부와 그 주변 인물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톰(짐 브로드벤트)과 제리(러스 쉰) 는 런던에 살면서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 부부는 텃밭을 가꾸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텃밭의 사계에 따라 소소한 삶의 순간을 즐긴다.
부부 주변에는 이러 저러한 연유로 불만에 차 있거나, 세상과 불화하며 불안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특히 제리의 직장 동료인 메리(레슬리 맨빌)는, 이미 60대(50대?)가 되었지만, 스스로를 젊은이 처럼 착각하며, 세상과 세상의 계절에 조화를 못 이루며 살아간다. 그녀는 깊이가 없고, 부평초 처럼 주위 사람들과 제리네 집을 떠돌아, 말하자면 마음의 집이 없는 사람같다. 톰과 제리 부부는 이런 주위 사람들을 품고 챙긴다.
영화적으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에 나는 왜 끌렸던 것일까? 세상에 이러 저러한 사람들이 있고, 텃밭의 사계가 천천히 지나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다시 텃밭 농사가 시작되며 돌고 도는.
노년에 이르러 왜 어떤 이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기쁘게 살아가고, 어떤 이는 불만에 가득차 불안한 삶을 떠도는 것일까? 사계의 시간 속에 어떤 사람은 세상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집을 짓고 삶의 계절에 따라 잘 익어가고, 또 어떤 이들은 뿌리를 못 내리고, 삶의 계절을 놓치고... 놓친 계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기에, 가을이 다가와도 잘 익어갈 수도 없고....
요는, 인생이 텃밭 농사 같다는 것일까?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철 따라 씨를 뿌리고, 햇빛을 견디는 날들을 묵묵히 거쳐 담담히 노년의 삶으로 나아가는 게 삶이라는. (굳이 해석을 하다 보니 너무나 상투적인 멘트로 흘러가는 이 뻔-함이라니… 어쩔!)
아무튼 영화는 영국판 인간극장 같기도 하여, 지금도 런던 어딘가에 톰과 제리, 그리고 메리가 실재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인생 영화를 이야기하면, 나는 왠일인지 런던의 그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Another Year’를 인생 영화라고 하기에는 막상 할 말이 많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에게는 릴케의 시, ‘가을날’을 떠올리게 한다. 어렸을 때 이 시를 읽으면, 나는 두번째 구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나뭇잎들이 뒹굴 때면 가로수 길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거닐 것입니다."
가을날을 맞아, 집이 없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으며, 오래도록 혼자로 남는다는 것일까?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놓아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완전히 영글도록 명해 주소서;
그들에게 더 남쪽의 낮을 이틀 더 베푸시어,
그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묵직한 포도송이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깨어나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들이 뒹굴 때면 가로수 길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거닐 것입니다.
릴케의 시처럼, ‘Another Year’ 도 무언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데, 나는 아직 제대로 못 알아듣고 있다. 봄과 여름의 계절을 잘 살아내야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고 묵직한 포도송이에 단맛이 스미고... 그렇게 계절이 계절을 불러 들여 인생은 완성되고 익어간다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어쩌면 인생의 제 계절을 놓친 메리의 이야기를 좀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릴케가 노래한 집이 없는 사람들이 어렸던 나에게 던져 준 화두는 영화 ‘Another Year’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