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을 통해,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내다 -
이른 새벽에 잠이 깨면 EBS의 인문학 특강을 찾아 듣고는 한다. 며칠 전, 서강대 최진석 명예교수의 철학 강의를 비몽사몽 듣다가 또렷이 들려오는 이야기 한 대목.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핵심적인 질문을 하는 능력이다!’
인류 진화의 긴 역사에서 신문명의 사조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기존의 틀을 깨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핵심적 질문을 던진 사람들을 통해 그 사회는 새 시대를 연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자의 성장에 있어서 질문하는 능력에 대해, 나 또한 평상시 비슷한 생각을 해왔기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연구소라는 특성상 연구자로서의 직급 체계와 조직 및 인력 관리를 위한 관리자 직책 체계로 이원화되어 있다. 연구과제 수행은 과제책임자(Project Leader)가 있고 그 밑에 연구원들이 소속되어 연구과제를 수행한다. 과제는 연구실에 속하게 되는데, 보통 2~3개의 과제, 10~20여 명 정도가 하나의 연구실을 구성하고, 유사한 기술군의 연구실들을 묶어 연구본부, 연구소 등으로 조직이 구성된다.
한편, 연구자의 직급체계는 연구원(Resesrcher), 선임연구원(Senior Researcher), 책임연구원(Principal Researcher)의 3단계로 되어 있다. 보통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학력 및 경력에 따라 연구원(Researcher) 혹은 선임연구원(Senior Researcher)으로 입사를 해서, 수년에서 십여 년의 경험을 쌓아 선임연구원이 되고, 더 나아가 책임연구원(Principal Researcher)으로 직급 승진이 된다. 기술전문가 그룹을 지향하는 연구소의 특성상 대다수 연구원들은 보직을 맡지 않은 평연구원으로서 살아가게 되며, 연구소에서의 직업적 역할에 대한 개인 정체성은 보통 이런 3단계 직급체계가 기준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 3단계 직급 체계 하에서, 어떻게 사람을 키워야 하며, 직급 간 시너지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 종종 생각해 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직급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면서, 막상 직급에 따른 역할이나 능력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주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아도 참고할 만한 의견을 듣기가 어려운데, 실상 돌아보면 나도 직급 승진에 따른 역할 차이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때 되면 선임으로 승급하고, 또 나름 열심히 살다 보면 남들처럼 적당한 시기에 책임연구원이 되었다고나 할까? 연구자로서 성장하고, 그에 걸맞은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어떤 과제에 연구원,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들이 섞여서 함께 과제를 수행할 때, 직급이라는 것의 시너지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직급에 따른 바람직한 역할 모델이 모호하다고나 할까?
연구자는 어떤 인재로 성장해 가야 하며, 조직에서 그 직급에 따라 역할과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연구원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어떤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하고 성장해 가야
우수한 연구원이 될 수 있는가?
선임연구원은 과제 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어떤 능력을 갖추어야
핵심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가?
책임연구원은 연구원이나 선임연구원들과 달리 과제나 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
자문자답 끝에 연구 직급에 따른 역할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봤다.
우수한 연구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면, 그 방법대로 성실히 실행을 해서 기술적 목표를 잘 달성할 수 있는 능력과 성실성을 갖춘 사람이다(Know-How).
우수한 선임연구원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낼 수 있는 기술전문가이다(Know What & How).
우수한 책임연구원은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한 단계 앞을 내다보며 핵심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앞으로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지를 탐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즉, 핵심적인 질문을 통해 과제원들이 현재를 벗어나, 기술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사고 지평의 확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연구자이다(Know Why & What & How).
이처럼 연구원,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들이 섞여서 서로 시너지를 내며 성과를 창출해 내기 위한 나름의 직급별 정체성을 정리해 봤지만, 이런 역할론을 꺼내기에는 오늘날의 연구현장은 몹시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고령화 현상이 내 직장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주변의 동료 후배들은 웬만하면 다 책임연구원이 되어서, 풋풋한 연구원이나 선임연구원 보기가 꽤 어렵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핵심적인 질문자’ 로서의 책임연구원 역할論을 읊어대면,
‘책임연구원들이 질문만 하고 있으면... 소는 누가 키운대요? 너도 나도 다 책임인데’ 소리가 바로 나올 게다.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라 사실 할 말이 없다. 요는 한 분야에서 20~30년 경력을 쌓아 어떤 분야에 일가견을 이루었다면, 남들의 질문에 전문적인 답을 쓰는 능력을 넘어서, 그 이후를 바라보며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주위 사람들이 새로운 방향을 생각하고, 모색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최진석 교수님이 일갈하신 '핵심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정도의, 통념을 깨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일 것이다. 일테면 지금의 인터넷 문명을 만들어 낸 사람들, 웹을 고안한 팀 버너리스, 구글의 래리 페이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스마트폰을 최초로 꿈꾸고 만든 스티브 잡스, 김범수 같은 인물들이 그 시대에 던졌던 질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감히 '핵심적 질문 능력' 운운하는 것이 조금 민망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일상에서든, 연구현장에서든 우리가 서로의 갇힌 경험과 지식 세계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벽을 깨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벽을 깨는 질문을 던지려고 애썼다는 것은 벽 안에 머무르지 않고, 벽 너머를 생각해 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를 비롯해 내 주변의 대다수는 질문이 주어지면, 갖은 지식을 동원해 모범답안을 성실히 써내는 데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영 말이 안 되는 질문지를 받더라도 최대한 정답을 만들어보려고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경우도 가끔씩 있다. 말하자면, 한국적 교육이 만들어낸 범생이들이라고나 할까? 우수한 잠재력을 가졌으나, 그저 남들이 닦아 놓은 길을 열심히 걷거나 뛰는 것이다.
그래서, 세미나를 듣던 회의에 참석하던,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을 유심히 보고, 그들이 어떻게 성장할지 기대를 하게 된다. 물론, 나도 질문을 많이 한다. 남에게도 하고,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많이 하려고 한다. 질문을 하다 보면, 의미 없는 문제에 모범답안을 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고, 벽 너머로 우리를 이끄는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하게 될 날도 올 것이다.
아무튼, 지구 위에 머문 짧지 않은 시간, 연구소에서 일한 긴 기간을 생각하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책임연구원, 책임인간이 된 셈이다. 그러니, 이 길에서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겠느냐 같은 문제에 답을 쓰느라 노심초사할 때는 지났지 않았을까?
걷고 있는 이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곳이 진정 내가 닿고자 한 곳인지 질문을 해야 한다. 나의 질문들이 나만의 길로 나를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