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규과제 기획하다 옆길로 새는 까닭은
꽤 큰 규모의 과제가 올해 말에 끝나게 되어있어, 내년 이후를 대비해 신규과제 발굴이 필요한 상황이다. 실의 연구원 몇 명이 모여 몇달째 이런 저런 연구주제를 살펴보는 중이나, 괜찮은 아이템 발굴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모든 태어난 것은, 그것이 생명체이든 인간이 만든 조직이든 흥망성쇠를 겪는다. 기술분야는 어떤가? 어떤 기술분야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산업체, 학계 및 연구계 각각이 활발하게 살아있고, 이들이 잘 연계되어 서로에게 필요한 시장과 기술, 인력이 선순환되며 생태계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만약 이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면, 지속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 일 것이다.
내가 종사하는 정보통신 인프라 기술분야는 지난 20여년 동안 거의 탑 수준의 기술혁신을 이루어오며 각광을 받아 왔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기술이 성숙되고, 산업이 포화되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IT 기술의 흥망성쇠에서 유행에 가장 민감한 곳은 대학 아닐까 싶은데, 우리 분야를 연구하던 많은 학계 교수들이 타 분야로 옮겨 갔다. 물론 신진 연구자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신호들은 우리 분야의 생태계가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니, 대안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IT 기술 분야에서 어떤 한 분야의 기술이 쇠퇴하고, 다른 새로운 기술분야들이 각광을 받고 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통신기술의 발달이 정보화 사회를 이끌었고, 정보화 사회가 클라우드나 빅데이타, AI 같은 새로운 기술사조를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물론 지금 각광받고 있는 기술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기술 트렌드에 밀려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예전과 달리 산업과 기술의 라이프사이클이 몇년에서 몇개월 주기로 휙휙 바뀌는 시대를 살아 가고 있기에, 변화와 부침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문제는 흥성했던 시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 들 때, 개인이나 조직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이다.
기술전문가 개개인으로서는 두가지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존버'의 정신으로 자신의 전문 영역을 지키며 버티거나, 혹은 새로운 영역을 찾아 과감히 업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하든 쉽지 않겠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분야에서 쌓아올린 전문성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열심히, 제대로 노력한다는 가정, 그리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너무 늦지 않은 타이밍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진짜 난감한 문제는 변화의 기로에 선 조직이 조직 차원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다. 개인이 하듯이 존버의 정신으로 지키고 버틸 수 있다. 또 다른 방책으로는 조직을 지키되, 역할을 바꾸거나 확대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는, 조직을 축소하고, 구성원들을 타 분야로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정공법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작지않은 규모의 기술 조직이 시장 효용성이 한계에 달해 고객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존버의 정신으로 마냥 버틸 수는 없다. 임시방편으로 버티는 것은, 무엇보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변화를 수용하여 살아 남을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게 될 것이기에 좋은 대안이 아니다.
기술의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조직을 줄이고, 인력들을 타 분야로 보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가장 나은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조직이란 유기체와 같아서,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어떡하든 살아남으려는 특성을 갖는다. 심지어, 어떻게든 성장하고 커지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조직을 줄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 작심을 하고 욕먹을 각오를 해야 가능할 것이다. 변화의 기로에 선 공공 조직이 위기라는 것을 직시하는 통찰력과 정면돌파로서 문제를 풀겠다는 용기를 가진, 이 정도의 진정한 주인의식과 사명감을 가진 리더를 만나기는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그나마 쉬운 차선책은 조직의 형상을 가능한 유지하되, 그 역할을 조금씩 확대하고 변경해 나가는 것일 것이다. 비유를 해 보자면, 국수 가게 이름과 본업은 그대로 두고, 메뉴를 조금씩 추가해서 스파게티나 베트남 쌀국수 같은 것으로 업종을 다양화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고 할까? 그런데,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국수가게에서 자타공인 국수 장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만드는 스파게티나 쌀국수가 시장에서 통할 수 있을까? 이런 정체성 확장 노력이 시시각각 변하는 복잡한 기술산업 생태계 속에서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노력을 해 볼 수는 있으나,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은퇴가 멀지 않은 나는 대체로 우리 분야의 가장 좋은 흥성의 시절을 함께 해 왔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으로 이 분야에서 최소한 십여년 이상을 더 버텨야할 후배들을 생각하면 종종 착잡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한창 나이의 그들이 과연 전문가로서 제대로 된 경험을 쌓고 있는가? 혹시 국수가게 상호를 그대로 둔채로 스파게티나 쌀국수를 만든다고 땀을 흘리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차라리 조직 규모를 줄이더라도 제대로 된 국수가게로서 정체성을 갖는게 낫지 않을까? 인프라 기술로서 공적인 영역의 전문성은 가져가되, 수요가 애매한 산업화 기술은 단계별로 줄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부 인력은 제대로 된 스파게티나 쌀국수 가게에 가서 경력을 쌓고 의미있는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과제기획을 대하는 심정이 요즘 날씨마냥 갑갑하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과제를 만든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 업의 어느 구석진 모퉁이에 좁디 좁은 오솔길을 만들고, 애꿎은 후배들은 그 오솔길에서 헤매다 정작 길을 잃게 만드는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 진다.
그래서, 솔직히 내가 쓰고 싶은 한장의 제안서는 바로 이것이다.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 입니다.
이 배에 타신 분들은 다음 기착지에서 내려, 각자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배를 갈아 타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행히 최근 국가 연구개발 예산이 조금 여유가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까지 입니다 하며, 우리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더라도 구성원 입장에서는 비교적 쉽게 다른 영역에서 기회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를 모색할 타이밍이다. 구성원들이 한살이라도 젊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 낫다. 비록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영역에서 자리를 못 잡고 헤맬 수도 있고, 또 일부는 아예 새로운 배를 탈 기회 조차 못가져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조직이 인적드문 오솔길을 만들며 버티다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된다.
흥한 것이 때가 되어 쇠락하게 되는 것은 운명같은 것이다. 직시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낫다. 때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 때가 있다고들 한다. 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의를 속시원히 하고, 용기있는 결단을 촉구하고 싶지만, 사실 말이 쉽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