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삶 (2)

- 허겁지겁 은퇴자 교육, 그리고 덕산의 아기 고양이 까망이

by 나무Y

지난 주에 예비 은퇴자 교육을 받기 위해 덕산 온천타운의 S 리조트를 3박 4일 동안 다녀왔다. 오고 가는 길에 보니 파아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두둥실 떠 다니고, 들녘이 어느새 옅은 올리브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버리고, 떠나고, 이곳 저곳을 떠돌게 하는 여행의 계절이다. 볼륨을 한껏 높혀 가을 노래를 들으며 덕산으로 항했다.


교육장에서 만난 이들은 나처럼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소에 일하며 은퇴를 1-2년 앞 두고 있는 분들이다. 평상시에 나는 나이 따위는 곧잘 잊어 버리고 산다. 그런데, 교육장에 모인 한 무리의 낯선 이들과 딱 맞딱드리니, 내 나이가 확 와 닿았다. 누구랄 거 없이, 얼굴에, 몸에, 말투에, 앉아 있거나 걷는 모습에, 긴 시간이 녹아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딱 보기에도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도 교육에 참석한 다른 분들 역시 초면의 나를 보며 불현듯 그들의 나이를 깨달았을수도!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대추 한알 중에서, 장석주 시인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이나도 일과 가정이라는 2개의 바퀴를 굴리느라고 앞만 보며 바쁘게 살아 왔다. 이제, 공식적인 은퇴일을 일년여 앞두고 보니, 삶은 일과 가정이라는 바퀴 2개로 굴리는 자전거가 아니라, 이런 저런 기둥을 세워 균형잡힌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딱하기 짝이 없는 헛똑똑이였다는 것이, 내 삶의 기타 등등이었던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신경쓰고 챙겨온 것도 별로 없고,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없다는 때늦은 깨달음이랄까! 그래서 이번 예비은퇴자 교육에 참석해서 인생 2라운드를 잘 시작하기 위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며, 어떤 것들에 신경을 쓰면서 1라운드를 마무리하고 2라운드를 시작해야 하는지 통합적인 시각을 가져보는 시간을 갖자 라는 심정이었다.


과연, 이번 은퇴 교육에서는 인생의 집을 구성하는 5대 기둥이라고 할 건강, 역할(미션, 일, 가치), 돈, 관계, 재미에 대해 은퇴설계, 보험/재무/투자 설계 등 간 분야의 전문가들로 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울러, 이미 은퇴하여 나름의 영역을 개척하며 열심히 살고 계시는 인생 선배님들의 실전 경험도 듣고, 각자 자신의 은퇴 후의 생애 설계서도 작성해 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물론 아무래도 시간이 충분치 않다보니 깊이가 부족해서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삶의 2라운드를 시작하기 위해 어떤 지도와 나침판을 준비해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돈이야기, 투자이야기, 은퇴 이후의 재취업 등 실용적인 내용이 핵심이었지만, 교육 후에 특히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들은 몇몇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이었다.


o “다시 돌아가 내가 여러분의 입장이라면, 자식에게 너무 많은 것을 누리게 하지는 않겠다.”


꽤 널리 알려진 투자/은퇴설계 전문가이신 강사님께 교육생 한 명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찾아 아주 성공적이고 활동적인 2nd Life를 살고 계시는데, 혹 후회하시는게 있는냐? 시간을 거슬러, 다시 은퇴 무렵으로 돌아간다면, 고치고 싶은 것이 있으시냐?"


성공한 그 투자/은퇴전문가는 답했다.


"나의 은퇴와 재 취업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다만, 후회되는 한가지가 있다. 다시 돌아간다면...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지 않겠다.

아이들이 결핍에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 시키겠다."


o 열심히 하는 좋지요. 그런데...창업은 하지 않았다면 좋을 .....


강의와 멘토링 활동으로 제 2의 인생을 매우 활기차게 살고 계시는 선배 은퇴자에게 물었다.


"지금 후회되는게 있으신가요?"


한 때 '나는 자연인이다'를 꿈꾸다가 어쩌다 보니 현역 못지 않게 바쁘게 사시게 되었다는

그 선배 은퇴자는 답했다.


"여차 저차해서 창업을 했는데, 아무래도 창업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다.

강의를 하고, 멘토링을 하고 하는 것은 나름 의미도 있고, 보람을 느끼는데…

창업은 아닌 것 같다. 서류 작업도 엄청나고 너무 바쁘고... 정말 여유가 없어진다."


o 건강, 진심을 다한 인생 목표 !


교육생 중의 한 분은 거동이 불편해 보이셨는데, 은퇴를 앞두고 난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2라운드 인생 목표는 체중을 감량하여 당장의 건강 문제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웰 다잉을 잘 준비하는 것"이라고 진심을 담아 나직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o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교육을 왜 이제서야...


쭉 들어보니, 이런 교육은 적어도 은퇴 5~6년전 , 아니, 오십 고개에 들어서면 의무적으로 한번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머리 히끗히끗한 교육생 한 분이 강사에게 건의했다.


"은퇴가 코 앞인데, 이제서야 노년의 보험, 노년의 재무/투자, 이런 저런 관계 관리... 제2의 직업, 우짜고 저짜고 이야기를 해 주면 우리더러 우짜라고요?

우리 후배들은 50대에 은퇴교육 시켜주세요 !"


강사님이 답했다.


"네~, 많은 분들이 젊은 사람 대상으로 미리 미리 교육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젊은 그 분들한테 은퇴교육 이야기 꺼내면요.

아니 앞으로 일할 날이 하 세월인데... 왜 벌써 이런 교육을 해요? 하면서 화내요, 화!”


사실 나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일과 가정의 두바퀴를 요리조리 돌리느라 숨가쁜데... 미리 받는 은퇴교육 우짜고 하면, 솔직히 열부터 확 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어 다행이긴 하다. 고용보험이니, 건강보험이니, 재취업이니, 연금이니, 국민내일배움카드니, 이런 저런 교육 싸이트이니.... 암 것도 모르고 집에 갈뻔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은퇴날짜 받아 놓고 교육이라니, 미리 좀 해주지...


그러나, 사람은 결국 자기 코 앞에 닥쳐야 제대로 듣고 챙겨본다.


o 우리는 오직 일하는 존재이다!?


마지막 교육날, 제2의 인생설계를 쓰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은퇴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일과 역할을 열심히 하시겠다고 빼곡히 써 놓으신 분들이 참 많았다. 나도 이런 저런 계획을 나름 꼼꼼이 챙겨 적었다. 2년 안에 이런 책을 쓰고, 5년 안에 이런 저술활동을 하고.


사실, 닥치면 무엇이든지 자꾸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 내 고질적 문제이긴 하다. 한 때 내 개인 SNS 대문칸에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거창하게 써 붙여 두었던 적이 있다.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내 삶의 주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겠노라 전투적으로 살았다.

이제 은퇴를 앞두니, 앞만 보며 내달려온 자전거에서 내려서서 '자유롭고 재미있는 할머니가 되어 휘뚜루마뚜루 가볍게 살겠다'고 작심하고 있다.


'그동안 일 마이 했다 아이가 !

마~ 그만하면 됐다! ‘


진심이다. 나는 더이상 일하는 존재가 아니다.


o 그리고... 여행에 대해


두번째 날이었나. 오후에 여행 관련 교육이 있었다. 여행전문가라는 젊은이의 자신감 넘치는 하이톤 강의를 듣다가, 마!침!내!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여행을 스마트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여행 사이트들, 국내외 숙소를 비롯한 여행 정보를 손쉽게 검색하는 방법... 제주도의 독채집 찾는 사이트가 어쩌고 저쩌고... 아.. 여행잡지의 별책 부록에나 나올법한 잡다한 정보와 스킬들을 은퇴교육을 통해 챙겨줘야 할 나!이!가 은!퇴!하!는! 나!이! 라는 말인가!


그 긴 시간을 걸어, 은퇴하는 나이가 되었으면, '여행의 스킬'이 아니라 '여행의 철학' 같은 것을 생각해 볼 나이 아닐까! 남들 다하는 것 처럼이 아니라, 왜 여행을 하는지, 스스로 생각하는 가치와 스스로 생각하는 여행의 방식, 우리의 여행이 지구에 남기는 흔적에 대해. 무엇보다 삶도 여행이기에... 시간 여행자로서 남은 나날,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하루의 시간여행을 누구와 어떻게 할지 물어봐 주는 정도의 깊이는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o 우리 모두 결국은 위의 삶일 것이다


아주 의미있는 따끈한 여행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듯 확신에 찬 젊은이의 목소리에 괴로워하다가, 나는 그냥 강의실을 나와 S리조트 산책길에 나섰다. 그 짧은 산책길에서, 온통 까망털 옷을 입은 아기 고양이와 검은 줄무늬, 황색 줄무늬 옷을 입은 고양이 3마리를 만났다. 그들은 워터파크 푸드코트 앞 나무데크에서 온 몸을 동그랗게 말아 엎드려 졸고 있었는데, 초 가을 햇살이 고양이 등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자고 있는 그들을 한참 보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덕산 S 리조트의 길냥이)

(덕산 S 리조트의 까망이 아기 고양이)


어쩐지 좀 쓸쓸한 기분이 들어, 한참을 서성였다. 이제 막 길 위의 삶을 시작한 작디 작은 까만 아기 고양이에게 무어라도 힘이 될 한마디를 들려 주어야 할 것 같다. 마치 길냥이 삶의 1라운드 종착역을 눈 앞에 둔 예비 은퇴 길냥이라도 된 듯, 마음을 담아 아기 길냥이에게 전해 줄 삶의 경구를 구석 구석 찾아 보지만, 딱히 도움될 말이 없다. 힘껏 살아보라고? 재미나게 놀으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냥 마음가는 대로 살으라고?


바야흐로 가을이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 산속 풀잎은 마르고, 나뭇잎은 떨구게 하는. 무겁게 이고 지고 온 짐들은 내려 놓고, 가볍게 짐을 꾸려 다시 시간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할 때 인 것이다. 2021년 9월 말, 덕산에서 만난 머리 히끗히끗한 은퇴교육 동기 아저씨들과 S리조트에 기대어 살아가는 길냥이 3마리, 아기 고양이 까망이.


우리 모두, 결국은, 길 위의 삶이다. 온 마음을 다해 머무르고, 때가 되었다 싶으면, 속전속결로 떠날 일이다. 그러니, 아기 냥이 까망이에게 들려 줄 이야기는 결국 '다가오는 시간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는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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