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왜 하는데? 어디다 쓸건데?"
Y선배가 정년 퇴직을 하게 되어, 수요일 점심에 몇 사람이 모여 같이 점심을 먹으며 감사와 축하를 전하게 되었다. 직장 내 여성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진 자리라 간소하긴 하지만 약력도 소개하고, 감사패도 전달했다. Y선배는 학교 선배이기는 하나 과가 달라 그리 가깝지는 않았다. 당시 여성이 흔치 않던 공학 분야에서 그 선배는 뛰어난 학생으로 꽤 유명했었는데, 연구소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많이 낸 것 같아 보기에 좋았다. 뭐... 물론, 이런 저런 일을 했고, 무슨 무슨 상을 받았고..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무얼했나 싶은 생각도 슬쩍 하게 되더라는.
마침, Y 선배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어, 점심으로 제공된 도시락을 먹으며, 은퇴를 앞두고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이야기 중에, 직장에서 지원하는 퇴직 준비 교육 프로그램으로 소묘를 배웠다며, 휴대폰에 저장된 데생 한장을 보여 주었다. 그림에 문외한이기는 하지만, 얼핏 보아도, 완성도가 상당해 보여서 내심 놀랐다. 일에서나 일상에서나 조용하지만, 자로 잰 듯 정확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전형적인 공학자 모습 속에 저런 재능이 숨어 있구나.. 아무튼, 교육 지원 기간이 끝나 그만둘까 하는데, 강사가 계속 해 보라고 자꾸 권유를 하는 중이란다. 그러게...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계속 하지 왜 그만두려고 하느냐는 내 물음에 Y선배는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재미있기는 한 것 같은데,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단다.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 계속 해야겠다는 마음이 안 생긴다는 것이다.
쓸모라....
이공학을 전공하고, ICT 기술 분야의 연구소에서 30여년을 넘게 일 한 우리들은, 말하자면 공학자나 개발자로서 엔지니어 마인드에 젖어 살아왔다. 어떤 연구주제든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주제가 현실 세상의 어떤 기능적, 성능적 문제점을 해결하거나, 아니면 솔루션에 드는 비용을 확 낮추어 주어서 세상에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태도. 이러한 가치 사고는 물건이나 일을 대할 때 어떤 실용적 쓸모를 갖느냐를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태도는 직업병처럼 체화되어, 심지어 사람을 대할 때에도 어떤 실용적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내심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저 재미로 무슨 일을 잠시 해 볼 수는 있으나, 재미있다는 이유 만으로 어떤 일을 꾸준히 하기는 어렵다.
"그거... 왜 하는데? 어디다 쓸건데?"
이 질문을, 남들이 묻는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공학자로 너무 오래 살아온 것일까?
아무튼, 그림을 그만할 것 같다는 Y선배의 심정을 나는 십분 이해했다.
"글쓴다고?.. 왜 쓰는데? 글써서 뭐할건데?" 이러며 나도 글을 쓰다 말다 하는 중이기에.
그런데, 은퇴를 하고 나면, 아마도, Y선배나 내 앞에는 또 하나의 어려운 질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실용적 쓸모"를 따지는 이 몹쓸병, 하루 빨리 치유해야 할 듯.
Y선배도 "쓸모병"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그저 순 재미 만으로 이일 저일 많이 벌려 보기를. 그러라고 은퇴를 시켜주는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