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나날

Remains of the Day, 가즈오 이시구로

by 나무Y

소설 Remains of the Day, 가즈오 이시구로


일본계 영국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 소설인 ‘남아있는 나날(Remains of the Day)’을 읽었다.


이 소설은 영국의 유서깊은 외교 명문가 달링턴홀의 집사장인 스티븐슨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어수선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달링턴경은 종전 후 뿔뿔이 흩어진 유럽각국의 대표들을 한 자리에 모아 유럽 재부흥의 토대를 만들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하는 것을 자신의 시대적 소명으로 생각한다. 스티븐슨은 달링턴홀의 집사장으로서 직무에 헌신하고 명예와 자부심을 지켜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집사장으로서 달링턴경의 시대적 소명과 그 방향에 대해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충직한 일꾼으로서 최선을 다한다. 한편, 하녀장 켄튼은 달링턴홀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데, 믿을만한 일 처리로 스티븐슨의 신임을 받는다. 그녀는 남몰래 스티븐슨을 연모한다.


소설은 유럽 주요 나라의 외교실세들이 달링턴홀로 초청되어, 외교모임이 이루어지는 어느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모임에서 달링턴경은 1차 세계 대전 후 배척받고 있는 독일을 유럽이 다시 받아들이도록 갖은 외교적 노력을 다한다. 스티븐슨은 주인의 시대적 소임이 흠결 없이 완수될 수 있도록 그날의 행사를 준비하고, 손님들을 완벽하게 접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그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디너파티가 한창인 시간에 저택 다락방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스티븐슨은 집사장 직무에 충실하느라 그의 아버지를 보살피지 못하고, 하녀장 켄튼이 그 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다. 스티븐슨에게 마음을 두었던 하녀장 켄튼은 이 일을 겪으며, 그의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깨닫게 되고, 후일 그의 곁을 떠나가게 된다. 켄튼에게 마음을 두었던 스티븐슨도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이 집사장으로서 직무 수행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


소설은, 세월이 한참 흘러,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달링턴 경도 죽은 후, 스티븐슨이 먼 곳에 살고 있는 켄튼을 방문하는 일주일 여의 평화로운 여정 속에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시각으로 진행된다.


그 어느날 달링턴 경이 주도한 외교적 노력에 힘입어 독일은 다시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되고,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전 유럽을 고통에 빠뜨리게 된다. 스티븐슨이 믿고 헌신했던 달링턴 경은 역사적 죄인이 되어, 매국노라는 대중의 불명예스러운 평판 속에 사망하고 만다. 달링턴홀은 미국의 신흥 부호에게 팔리고, 스티븐슨은 새 주인을 섬기며 저택을 꾸려 가게 되나, 세상은 바뀌었고, 예전과 같은 집사장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 여행길에서 스티븐슨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집사장으로서 자신이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괜찮은 집사장이었는지를’ 자문한다. 그리고 ‘자신은 집사장으로서 책임을 다 하였으며, 직업인으로서 스스로 명예를 지켜왔다고.’ 자답한다. 또한, ‘집사장인 자신이 달링턴 경의 ‘옳은 판단’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자답한다.


소설은 스티븐슨이 이십여년 만에 켄튼을 만나서 달링턴홀의 하녀장으로 돌아와 줄 것을 요청하나 켄튼이 그녀의 개인적 삶을 위해 그 요청을 거절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스티븐슨의 헌신, 그러나 결국 헛된 삶이었을까?


책을 덮으며 나는 스티븐슨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직업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명예심, 사람에 대한 헌신이라는 고귀한 품성을 갖춘 스티븐슨은 최선을 다해 그의 역할에 충실하였으나 그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달링턴경의 불명예스러운 종말로 그가 믿었던 삶의 가치도 훼손되었고, 그가 그렇게 소중히 생각했던 직업마저도 의미가 퇴색해 버렸다. 비록 소설 속에서 스티븐슨이 그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삶은 스티븐슨을 기만한 것이다.


스티븐슨의 인생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 ? 시대적 대전환기에 인간은 그저 그 틈바구니에 끼어 각자가 믿는 바에 따라 혼란의 시기를 묵묵히 겪어내고, 그 결과가 기대 밖이라고 하더라도 불평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 아니면, 인간은 어떤 위치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각자가 개인적 삶의 참 주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며, 그러한 적극적 인식과 선택의 결과로서 자신의 삶과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 나는 후자의 시각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삶은 무엇이었을까 ? 달링턴경이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때, 달링턴홀과 시중에 떠도는 불길한 이야기들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함으로써, 달링턴경의 어리석은 판단을 바로잡을 기회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또한, 직업에 함몰되는 삶의 대안으로서 캔튼과 가정을 이루어 균형잡힌 삶을 살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백여년 전, 영국 왕조주의 시대를 살아간 스티븐슨에게 개인으로서의 판단과 선택이 얼마나 가능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그가 개인으로서의 판단과 선택에 대해 가능성 자체를 아예 차단하고, 낡은 체제와 가치에 맹목적으로 헌신한 부분은 그가 얼마나 닫힌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즉, 집사장이라는 사회적 역할과 타인의 기대치에 함몰되어 켄튼과 함께 이룰 수도 있었던 개인적 삶의 가능성과 의의 자체를 아예 배제해 버린 삶의 태도는 그의 책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수동적으로 인식하여, 세상의 흐름과 방향에 대한 ‘옳은 판단’의 문제는 아예 그의 몫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고, 그런 소극적 사회 인식이 종국에는 그의 삶을 헛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문명의 대전환기를 건너는 ,

깨어있는 정신으로 변화의 방향을 인식해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스티븐슨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 스티븐슨이 살았던 어지러웠던 세상처럼, 우리는 지금 문명의 대 전환의 시기를 건너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치와 힘, 직업과 윤리 등 많은 것들이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대 전환의 시대에, 우리도 혹여 스티븐슨처럼 ‘옳은 방향성에 대한 판단’은 나의 몫이 아니라고 제쳐두고, 낡은 체제와 가치에 맹목적으로 충실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 봐야 한다. 개개인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지, 각자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 앞에 벌어지고 있는 변화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 때, 우리 삶도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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